[한겨레 프리즘] 성연철 ㅣ 전국팀장
변하지 않을 일을 기록하는 것은 무참한 일이다. 알리고 고치는 것을 일삼는 신문의 글이라면 무력감은 더하다.
“300kg 철판에 깔린 아들, 아직 못 보냅니다.”(5월7일) ‘선박 용접 중 떨어지고 기계에 끼이고…어버이날 삼킨 산재’(5월10일) ‘이번엔 크레인…노동자 또 추락사’(5월17일) ‘삼성중 조선소에서…노동자 또 추락사’(5월22일) ‘또 항만사고…후진 지게차에 참변’(5월24일) ‘300㎏ 파지 더미 ‘와르르’…또 화물차 노동자 참변’(5월29일) ‘노동절로 연 한달도 산재 얼룩, 주말 울산 아산서 3명 또 숨져’(5월31일)
지난 한달 <한겨레>가 기록한 노동자 사망사고다. ‘또’, ‘이번엔’이란 말을 빼고는 죽음을 기록할 재간이 없다. 굴려 올린 순간 다시 떨어지는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죽음은 기록하는 순간 다시 이어진다. 산업재해예방 안전보건공단 누리집에는 555번부터 6월의 죽음이 기록되고 있다.
죽음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인천, 평택, 창원, 세종, 거제, 아산, 울산…. 그러나 사회는 노동자의 죽음에 주목하지 않았다. 클릭수에 혈안이 된 매체들은 서울 강남 한강변에서 젊은이가 숨진 사건의 절반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버지와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다 300㎏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23살 이선호씨의 죽음도, 화장실 간 동료 일을 대신 하다 기계에 머리가 끼여 숨진 이주노동자의 죽음도 그저 그러했다.
드러난 것이 죽음의 전부가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산재 발생 대비 은폐 비율이 66%라고 했다. 실제 산재 사건보다 2배가량 많은 사고나 질병은 묻힌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사고는 편의적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란 것을 만들어두고 눈을 돌린다. 사업주도, 정치인도, 시민도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법이 누더기이자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안다. 노동자가 일하다가 숨지거나 다치면 책임자를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했다는 이 법은 내년 1월에야 적용된다. 아직 세상에 없는 법이다. 게다가 50인 미만 회사에는 2024년부터 적용한다. 법이 얼마나 껍데기인지는 지난해 산재로 숨진 사람 81%가 50인 미만 회사에서 나왔다는 ‘팩트’가 증명한다. 이마저도 5인 이하 회사에는 언제부터 법을 적용하겠다는 기약조차 없다. 공동체가 그저 ‘두고두고’ 보고만 있겠다고 선언한 것이자 더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겐 ‘가만있으라’는 묵시적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법이 두려워 현장의 죽음을 예방하겠다는 것은 ‘밑지는’ 일이다. 2013년에서 2017년까지 산재 상해사망 사건 벌금형 평균 액수는 450만원이 채 안 된다. 노동자 한명이 죽든 열명이 죽든 사업주나 원청이 내는 벌금은 같다. 싼 노동자 목숨값과 비싼 안전설비를 바꾸는 일은 ‘비합리적인’ 일인 셈이다. 이대로는 자본의 컨베이어벨트가 작동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다.
작가 김훈이 ‘야만’이라며 노동자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거리에 선 게 꼭 2년 전이다. 2019년 6월14일 청와대 앞에서 “노동자들은 추락, 폭발, 붕괴, 매몰, 압착, 중독, 질식 등으로 죽어 나갔다. 몸이 터지고 으깨지고, 간과 뇌가 땅바닥에 흩어졌다”고 외쳤다. 20년 전쯤 ‘거리의 칼럼’을 썼던 <한겨레>에도 “사람들이 날마다 우수수 우수수 낙엽처럼 떨어져서 땅바닥에 부딪혀 으깨지는데, 이 사태를 덮어두고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라고 급히 적어 보냈다.
그리고 2년 뒤. 우리는 안다. 지난 가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낙엽처럼 혹은 눈발처럼, 아카시아 꽃잎처럼 노동자들이 떨어졌다는 것을.
찰스 다윈은 “얼굴을 붉히는 특성은 모든 표정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가장 인간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덕목이자 인간으로 되돌리는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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