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3일 밤 경기 오산 미 공군기지에 도착해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 대사, 폴 라카메라 주한미군사령관의 영접을 받고 있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보이지 않는다. 주한미국대사관 트위터 갈무리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직접 만나는 대신 예정에 없던 전화 통화를 했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중국이 강하게 항의하며 이날 대만을 완전히 포위하는 형태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하는 등 미-중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신중 모드’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면담 여부를 두고 대통령실이 보인 혼란스러운 메시지와 오락가락 행보는 외교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던 3일,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휴가 중이라 펠로시 의장을 안 만난다’고 했다가 ‘만남을 조율 중이다’ ‘최종적으로 만남은 없다’고 계속 말을 바꿨다. 이날 밤에는 윤 대통령 부부가 대학로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배우들과 뒤풀이하는 사진이 공개됐다. 4일 아침부터 ‘연극은 보러 가면서 미 하원의장은 왜 접견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강하게 나오자, 대통령실은 전화 통화 일정을 갑자기 발표했다.
펠로시 의장은 이날 오전 김진표 국회의장과 회담한 데 이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찾아 장병들을 격려했다. 이후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자택에서 펠로시 의장과 40분 동안 전화 통화를 하면서, 한-미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강조했다고 안보실이 전했다.
‘친미 반중’ 행보를 강화해오던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과의 직접 만남 대신 통화를 선택한 것은 미-중 갈등 속에 한국의 입장을 고려한 절충안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둘러싼 미-중 갈등은 예고되어 있었던 바다. 대통령실이 한-중 관계의 부담을 고려해 이런 결정을 했다면 그에 걸맞은 준비를 충실히 해서 혼선이 없어야 했다. 대통령실은 휴가 일정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했다고 강조했다. 전날 밤 펠로시 의장의 공항 도착 당시 우리 쪽에서 아무도 마중을 나가지 않은 것도 “미국 쪽과 사전에 조율된 것”이라 설명했지만, 일관성 없는 외교 태도가 ‘외교 홀대 논란’까지 부른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동맹인 ‘칩4’(한국·미국·일본·대만) 가입을 요구하고 있고 중국이 날 선 반응을 보이는 등 첨예한 외교적 환경에서, 한국은 명확한 입장과 원칙에 따라 흔들림 없는 외교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번 혼선을 보면서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외교 역량에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