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취임 뒤 첫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나 종군 ‘위안부’ 등 첨예한 과거사 현안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일본의 반성과 사과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복합 위기와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며 일본과의 협력 필요성만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균형감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필 3·1절 기념식에서 아무런 대국민 사전 설명도 없이 갑자기 우리의 일방적 양보를 시사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내야 했는지도 의문이다.
이전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첫 3·1절 기념사에서 예외 없이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일본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태도 변화 또한 요구했다.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았다. 이번 기념사는 이런 흐름을 한참 벗어났다. 이웃 일본과의 선린과 협력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이런 식의 과도한 급변침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실질적 양국 관계 회복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국민적 합의에 기반하지 않은 정권의 섣부른 노선 전환은 우리 내부의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또 일본에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아도 한국이 알아서 굽히고 들어올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날 메시지가 우리 정부의 저자세 대일 외교로 이어질까 걱정스럽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진 이상 정부는 한·미·일 군사 협력을 한·미·일 삼각 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큰 사안이다. 당장 양국 협의가 진행 중인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서도 일본 쪽의 입지가 커질 수 있다. 정부는 제3자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피해배상금을 변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일본은 자국 기업의 기금 조성 동참 등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 피해자 유족들도 일본 쪽의 사과와 재원 참여 등 진정성 있는 조처를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굽히고 들어갈 사안이 아니다.
대일 외교는 명분과 실리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역사적 앙금과 영토 갈등이 엄연한 상황에서 일본의 전향적 태도 변화와 피해자의 동의가 뒷받침될 때라야 한-일 관계의 실질적 진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