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사용자가 직접 고용하지 않았더라도 근로조건에 대한 실질적 결정권을 갖고 있다면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가 있다는 법원 판단이 거듭 나왔다. 이는 국회 문턱을 넘었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재의 요구권) 행사로 입법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의 입법 취지와 다르지 않다. 더 이상의 소모적 법적 공방이 이어지지 않도록 22대 국회가 1호 민생법안으로 재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24일 서울고등법원은 씨제이(CJ)대한통운이 택배 노동자와의 단체교섭 거부는 부당노동행위라고 판정한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특수고용직에 대한 원청 사용자의 교섭 의무를 인정한 항소심 법원의 첫 판결이다. 이번 사건은 2020년 3월 전국택배노조가 씨제이대한통운을 상대로 작업환경 및 근로조건 개선에 대한 단체교섭을 요구했지만, 고용계약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씨제이대한통운이 교섭을 거부하면서 불거졌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씨제이대한통운이 ‘기본적 노동조건에 관해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며 단체교섭에 응해야 할 사용자로 인정했는데, 2심 재판부도 이에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씨제이대한통운은 “무리한 법리 해석”이라고 주장하며, 판결문 검토 뒤 상고할 계획이다. 현재 대법원에는 이 사건 외에도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소속된 금속노조가 원청인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청구한 사건도 계류 중이다. 그동안은 원청이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경우 사용자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있었는데, 원청의 사용자성 범위가 단체교섭 의무로 확대된다면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지난 연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던 노란봉투법은 원청이 하청의 근로조건 결정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 사용자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업 편의에 따라 외주가 늘고 고용 형태가 복잡다단해지면서, ‘진짜 사장’을 찾느라 파업을 벌이고 소송에 나서야 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진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가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 협약(87호·98호)에도 부합하는데다, 원·하청 간 임금 격차 완화와 노동시장 이중 구조 개선이라는 명분도 갖춘 법안이었다. 언제까지 ‘교섭 당사자와 파업 대상을 무리하게 확대한다’는 억지 논리만 펼 것인가. 노란봉투법 취지를 거듭 인정한 이번 법원 판결을 계기로, 정부·여당이 전향적 자세로 재입법 추진을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