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에 대해 시민사회뿐 아니라 전국 판사들도 연일 회의를 열어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그런데 고위 법관들의 분위기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서울고법 부장판사회의는 지난 5일 회의에서 최근의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대법원장이나 법관대표회의 등이 나서 수사를 촉구하는 방안을 우려한다고 했다. 7일 전국 법원장 회의도 ‘책임 통감’ 표명과 함께 ‘고발·수사의뢰는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재판에 대한 국민 신뢰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에서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 한마디로 사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본 이들의 안이한 인식이 놀랍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사법부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하기 위한 조처가 시급하다”며 “대법원장이나 전국법관대표회의 등이 고발이나 수사를 촉구할 경우 관련 재판을 담당할 법관에게 영향을 미쳐 법관과 재판의 독립이 침해될 수 있음을 깊이 우려한다”고 주장했다. 재판 자체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우려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법관들이 ‘수사까지 가면 안 되니 그만하자’고 해서 미봉될 상황이 아니다. 국민 불신을 회복하려는 성찰·다짐 대신 내부의 갈등 치유가 시급하다는 주장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합리적 근거 없는 재판 거래 의혹 제기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는 전국 법원장들의 주장이야말로 우려스럽다. 일부만 공개된 사법농단 문건은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흔적’ 이상의 정황을 보여준다. 원세훈 사건이 대표적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바람대로 전원합의체로 신속하게 넘겨졌고, 행정처 심의관이 작성한 쟁점분석 보고서는 사건담당 연구관에게 넘어가 판결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파기 뒤에도 행정처 판사가 환송심의 재판장 및 주심과 직접 통화하는 등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공보판사는 법정에 직접 들어가 상황을 차장에게 보고했다. 주요 문건들은 ‘우병우의 카운터파트너’라던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에게까지 보고됐다.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사례’로 예시한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은 대법원에서 뒤집혔고, 발레오만도 사건은 문건 작성 뒤 대법원에서 파기됐다. 이런데도 재판 거래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형사처벌 대신 내부징계에 무게를 둔 대법원 특별조사단의 애초 결론은 더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법관이라고 해서 법 위에 설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