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에서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판서를 20대에 맡은 사람이 둘 있다. 남이(1441∼1468)와 이준(1441∼1479)이다. 둘 다 세조 임금의 피붙이다. 무관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소년출세’를 했다. 특히 이준은 병조판서에 이어, 만 27살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이 되었다. 518년 조선 역사에 20대 정승은 그뿐이다.
이준은 세조의 동생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이다. ‘구성군’ 군호를 받았다. 조선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했지만,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영의정을 맡았던 세조는 종친의 과거 응시를 허용했다. 세조는 무과에 장원급제한 조카를 총애했다. 1867년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26살의 이준에게 토벌의 총지휘를 맡겼다. 난을 평정하자 병조판서에 앉혔다. 신진세력을 키워 쿠데타 공신들을 견제할 요량이었던 것 같다. 곧 영의정에 앉혔다.
남이는 태종의 사위 남휘의 손자다. 무과에 급제해, 이시애의 난 평정과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웠다. 27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보름 만에 세조가 죽자 야심만만하던 남이에게 비극이 닥쳤다. 훈구대신들의 반대로 병조판서에서 밀려났다. 한달 뒤 역모죄로 죽임을 당했다. 영의정 이준은 남이가 죽고 석달 뒤 부친상을 당하자 물러났다. 이듬해 역모 고변에 휘말려 귀양길에 올랐다. 9년 뒤 귀양지에서 38살 나이로 죽었다.
이준이 병마도총사에 임명됐을 때 반응을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이가 젊고 배우지 못하였는데, 하루 아침에 중대한 일을 맡기니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소년출세를 보는 나이든 사람들의 반응이 대개 그랬을 것이다. 그가 영의정이 됐을 때, 우의정 김질은 19살이나 위였다. 아버지 임영대군은 대궐로 가서 “준은 어리석고 어리다”며 말렸으나, 세조는 술을 내왔다.
제1야당 국민의힘 대표 선거 예비경선에서 36살 이준석 후보가 1위에 올랐다. 본선 여론조사에서도 돌풍을 이어간다. 임명직 소년출세와는 성격이 다르다. 자신의 내공으로 돌파하고 있다. 그렇긴 해도 이를 악무는 이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으니, 성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언급한 권력 세계의 ’장유유서’는 무서운 사상이고, 감정이다.
정남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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