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한겨레> 자료사진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립대 총장 인선에 적극 개입한 정황이 청와대 문건을 통해 드러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청와대가 국립대 총장 인선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이 많이 나왔지만 문건으로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통령기록관에서 열람해 15일 공개한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2015년 7월22일 작성) 문건을 보면, “국립대 총장 임용제청 거부사안 소송관련, 방송대 경우 어제 정부가 2심 승소했는데 공주대와 경북대 건도 잘 대응해 줄 것”이라고 적혀있다. 문건이 작성되기 하루 전인 21일,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류수노 한국방송통신대 총장 후보가 낸 임용제청 거부 취소소송의 2심 청구를 각하했다. 류 교수는 2014년 9월 총장 임용제청이 거부당하자 거부 처분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교육부의 조처가 부당하다며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임용제청 거부 취소소송을 냈고 1심에서 승소했었다.
지난 2014년 청와대는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방통대, 경북대, 공주대 총장 후보자에 대한 임용제청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당시 총장 후보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당시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이 “공주대와 경북대 건도 잘 대응해 줄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방통대 총장 후보자 관련 소송이 2심에서 각하된 것처럼 공주대와 경북대 총장 임용도 최대한 저지하라는 지시를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문건에는 또 “위 3개 국립대학 총장 부재가 1년 이상 가는 비정상적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문제인데 이런 상황을 조기 종식할 수 있는 가능한 대응책이 있는지 연구해 볼 것”이라는 이병기 전 실장의 지시도 적혀있다. 지난해 10월 청와대는 경북대 총장에 2순위로 추천된 김상동 교수(수학과)를 임명했다. 총장 공석 사태 2년 만에 신임총장을 임명했지만, 1순위가 아닌 2순위 후보자가 임명돼 논란이 해소되지 않았다. 공주대는 2014년 3월부터 43개월째, 방통대는 2014년 9월부터 37개월째 지금까지 총장 공석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국립대 총장 선출 방식은 ‘직선제’였지만, 지난 2011년 8월 이명박 정부가 국립대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총장 간선제 방식을 대학에 요구했다. 교육공무원법은 총장 추천위원회를 통한 간선이나 교직원들이 합의한 직선제를 통해 총장 선출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명박 정부 방침에 따라 재정지원 사업 대상을 정할 때 간선제를 택한 국공립대에 가산점을 주는 방식으로 간선제를 유도해왔다. 박근혜 정부 때는 이런 현상이 강화됐고, 특히 2순위 후보가 1순위 후보를 제치고 총장이 되거나 명확한 배경설명 없이 총장 후보의 임명제청을 거부하는 일이 거듭돼 논란을 빚었다.
문건에는 이병기 전 실장이 이같은 지시를 노골적으로 내린 내용도 적혀있다. 2015년 10월16일 작성된 ‘비서실장 지시사항’ 문건에 “대학 총장 선출제 관련(2016년 상반기까지 10여개 대학 총장 선출 필요), 일부 국공립대에서 직선제로의 전환 움직임이 있는 바, 정부 방침대로 간선제가 유지되도록 하고 직선제 전환시 재정지원을 차등화하는 등 직선제 전환 움직임 확산을 제어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2015년 8월 대학자율화와 총장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고 고현철 부산대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과 관련해 이병기 실장이 파문 확산을 막으라고 지시한 내용의 문건도 있다. 2015년 8월23일 ‘지시사항’ 문건을 보면 “교문수석은 부산대 교수 자살 건이 대학 총장 직선제 주장과 연계되어 더 이상 파문이 확산되지 않도록 상황관리해 주고, 특히 타 국립대학의 동조세가 나타나지 않도록 면밀히 점검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이후 부산대는 총장직선제를 유지해왔다. 당시 교문수석은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다. 김 교수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함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으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돼 복역 중이다.
김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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