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1998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치인 중 김대중만큼 일본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이도 드물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야당 정치인 시절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생사를 넘나들었다. 1981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일본 시민사회는 그의 구명에 적극 나섰다. 대통령이 된 뒤엔 한일관계의 초석이 된 공동선언문을 끌어냈다. 일본과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요즘 그가 종종 소환되는 이유다.
18일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는 날이다. 청와대 마지막 제1부속실장이자, 퇴임 후 김 전 대통령의 첫 비서실장을 지낸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난 14일 만났다.
김대중과 일본의 얽히고설킨 인연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생이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일본 국빈 방문 땐 고2 때 담임선생님을 도쿄의 한 호텔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일본과 악연으로 엮이기 시작한 건 1973년 8월8일이었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 끝에 낙선했어요. 병 치료차 일본에 머물러 있었는데 72년 10월 유신이 터진 거예요. 이희호 여사가 귀국을 말렸어요. 자연스레 망명이 됐죠. 이때부터 73년 상반기까지 일본에서 박정희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강연을 활발히 했어요. 박 대통령이 ‘왜 가만두느냐’고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시한 것 같아요.”
1998년 6월 공개된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의 비밀전문을 보면, 미 대사관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 아래 납치사건이 저질러졌으며 박정희 대통령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1998년 2월에 공개된 ‘케이티(KT) 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라는 중앙정보부의 극비문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휘 아래 모두 46명이 9개 조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도 1976년 6월22일 미국 하원 프레이저 위원회 청문회에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음을 자신이 수집한 정보로 확인하였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의 본질은 ‘김대중 살해 미수 사건’입니다. 납치 직후 미국이 이 사실을 알게 돼 박정희 대통령에게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결국 죽이지 못하고 배에 태운 채 며칠간 바다를 떠다니다 13일 새벽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 떨어뜨려 놓았죠.”
사건 직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주권침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범행 장소에서 당시 재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던 김동운의 지문까지 나왔다. 하지만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사과가 담긴 친서를 들고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만났고, 이후 진상규명 작업은 흐지부지됐다. 그 뒤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 레너드는 한국 정부가 다나카에게 3억엔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사건 직후 단교까지 거론하던 일본이 이 사건을 덮었습니다. ‘한일 결탁’이었죠.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실수이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죠.” 훗날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한국의 독재정권과 일본의 금권정치가 결탁한 매수 외교의 극치였다”라고 평가했다.
개인적 상처 덮고 일궈낸 새 한일관계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일관계는 전임 김영삼 대통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으로 최악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98년 10월 일본 국빈방문 일정이 잡혔다. 일본은 잔뜩 긴장했다.
“납치사건을 자신들이 덮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이 사건 사과를 요구할 수 있다고 봤어요. 일본 언론들은 연일 ‘납치사건에 대해 공식사과를 요구할 것’이라고 보도했어요. 부끄러운 역사였기 때문에 일본 전체가 김대중 대통령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조마조마해 했죠.”
하지만 일본을 찾은 김 대통령은 납치사건은 물론 양국 간 과거사 문제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국회연설 땐 ‘독재정권 하에 망명 생활할 때, 사형 선고를 받고 갇혀 있을 때 자신을 지켜주고 도와준 일본 국민과 언론인, 정치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일본 쪽은 일왕 초대 만찬장에서부터 이러한 전환이 분명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김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과거사 문제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일본 언론은 이 사실을 중대하게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흥분’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흥분은 다음날 참의원 본회의장에서 중·참 양원 의원들을 상대로 한 김 대통령의 국회연설 때 절정에 달했다.”(당시 국회연설에 대해 일본 언론과 정치권은 극찬을 보냈지만, 유독 아베 신조 당시 자민당 중의원 의원만 비판적이었다)
이 방문에서 김 대통령은 오부치 일본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을 끌어냈다.
“이 선언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의 사과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오부치 총리는 대한민국을 명시해 외교문서로 사과와 반성을 표시했어요. 이전에도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사과는 있었어요. 하지만 고노 담화는 ‘여성들에게’ 사과했고, 무라야마 담화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과했어요. 대상이 불분명했죠.”
공동 선언에는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는 대목이 포함됐다.
“공동선언에는 많은 원칙과 구체적 행동 계획이 담겼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한국 시장에 개방하겠다는 결정도 내렸어요. 국내에서 반대가 엄청났어요. 하지만 결과는 일본에서 한류 열풍이 불었죠. 일본인의 한국 관광도 급증했어요. 한일관계 르네상스였죠.”
김대중 전 대통령 마지막 부속실장을 지낸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일본에 집중한 건 한반도 평화 때문
김대중 대통령이 한일관계를 중시한 건 한반도 평화에 일본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2002년 12월23일 김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청와대에서 만났다. 노 당선자에게 알려줄 내용을 미리 노트에 메모했는데 분량이 에이포(A4) 5장에 달했다. 90% 이상이 주변국 외교에 관한 얘기였다.
“과외선생님처럼 꼼꼼하게 적어서 거의 그대로 전달하셨어요.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북한에 대해 5년간 느낀 점, 현재 그 나라들의 입장,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 등이 빼곡했죠.”
이날 만남에서 김 대통령은 당시 일본의 상황에 관해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은 노 당선자에게 ‘집권 중 한-일 관계를 많이 개선했다. 일본은 뿌리 깊은 대북 불신이 있다. 그렇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과 관계개선을 희망하고 있다. 투자나 관광만 봐도 경제적으로 한-일 관계가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한-일 관계에 대해 전향적 자세로 임해달라’고 조언했다.
김 의원은 최근 김대중 대통령의 이런 업적을 근거로 문재인 대통령이 대일외교를 잘 못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이들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은 외교 실력이 뛰어나서 한-일 관계를 잘 풀었는데, 문 대통령은 외교 실력이 부족하다고 트집을 잡는다. 이런 비판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대중 정부가 상대했던 오부치·고이즈미 총리는 평화헌법을 유지했고, 북한과 관계개선도 시도했다. 한반도 평화를 시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20년간 일본 정치가 극우화됐고,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 정치세력이 오부치·고이즈미 때 이뤄놓은 성과를 다 깨부쉈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있다면 지금 일본을 어떻게 상대할까. 김 의원은 “일본을 향해 크게 호통치셨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좌절시킨 건 일본이에요.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을 담은 외교문서를 사실상 폐기했죠.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 있어요. ‘김대중-오부치’에서 ‘김대중’은 그대로인데 ‘오부치’만 ‘아베’로 바뀌었어요. 지난 20년 역사는 일본 우경화의 역사입니다. 이대로라면 어떤 지도자가 와도 한-일 관계가 좋아질 수가 없어요.”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