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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통령실

박정희·박근혜·최순실의 ‘추억’에 지워진 목소리

등록 2016-12-16 21:30수정 2016-12-16 22:06

[토요판] 커버스토리
저도, 두 개의 기억

취임 뒤 첫 여름휴가를 떠난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2013년 7월 말 페이스북에 공개됐다. 최순실이 지휘·감독·선별해 전파한 것으로 최근 드러난 그 사진엔 대통령이 모래 위에 ‘연출’한 다섯 글자가 있었다. ‘저도의 추억’. 38년 전 아버지가 쓴 시의 제목은 그들 가족의 시간을 소환하며 화제를 불렀다. 대통령의 추억이 부각되는 동안 이야기되지 않은 ‘추억의 이면’이 있었다. 1.2㎞ 거리에서 저도를 마주보는 ‘청와동’ 사람들은 부녀 대통령이 추억을 쌓는 동안 ‘악몽’의 세월을 살아왔다. 저도가 속한 거제시 장목면은 김기춘의 고향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저도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저도는 ‘박근혜-최순실 공동정부’의 서막을 알린 동시에 박정희 부녀의 명멸과 그들의 척추 김기춘을 관통하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 장목 주민들은 30년 넘게 계속해온 ‘저도 반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사진 박근혜 대통령 페이스북 갈무리

맴맴맴맴 씨르릉 씨르릉
일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정든 섬에는
매미와 물새들이 옛 주인을 반기는 듯
성하의 태양이
백사장과 파도 위에
은빛같이 쏟아져서
눈부시게 반짝이고
암벽과 방파제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백옥 같은 파도가
일파(一波) 이파(二波)
또 삼파(三波) 사파(四波)

1975년 여름 그 섬을 대통령 박정희가 다시 밟았다. 찾아올 때마다 섬은 아름다웠다. “만고풍상 다 겪은 이끼 낀 노송은 해풍과 얼싸안고 흥겹게 휘청거”렸다. “지평선 저쪽에서 흰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랐”고, “밤하늘의 북두칠성은 천고의 신비를 간직”했다. 1년 전 문세광의 총에 사망한 아내 육영수는 섬에 오르지 못했다. 아내 없는 섬의 인상을 담아 박정희가 시를 지었다.

저도(거제시 장목면 유호리)는 하유마을(저도와 최근접 마을)에서 불과 1.2㎞ 떨어져 있다. 바다 건너에서도 저도의 시설물과 정박 중인 군함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이문영 기자
저도(거제시 장목면 유호리)는 하유마을(저도와 최근접 마을)에서 불과 1.2㎞ 떨어져 있다. 바다 건너에서도 저도의 시설물과 정박 중인 군함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이문영 기자

섬의 풍광은 자연에 인공을 더해 그의 앞에 차려졌다. 본래 홀로 아름다운 섬이었으나 ‘대통령 가족만을 위한 장치들’이 섬의 몸에 새겨졌다. 맴맴맴맴 씨르릉 씨르릉 우는 매미들은 막내 박지만이 그물채를 휘두르며 뛰놀도록 섬에 방사·번식됐다. 태양이 은빛처럼 쏟아지는 백사장의 모래는 대통령 가족의 해수욕을 위해 섬진강에서 실어 왔다. 그 섬에서 큰딸은 가장 단란했던 가족의 한때를 얻었다. 2013년 여름 딸은 그리운 섬으로 돌아왔다. 대통령 아버지와 여름마다 찾았던 섬에서 대통령이 된 딸이 그 매미 소리를 들으며 그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썼다.

“저도의 추억”

38년 전 아버지가 섬에서 읊은 시의 제목이 38년 뒤 백사장 위로 불려나왔다. 지지기반의 뿌리가 아버지인 딸이 취임 뒤 첫 여름휴가지에서 아버지를 소환하며 ‘추억 정치’를 연출했다. 그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이 대통령 페이스북을 타고 전파(2013년 7월30일)됐다. 최순실의 지휘·감독 아래 선별·공개된 사진이란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그 섬 ‘저도’(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가 부녀 대통령의 ‘정든 섬’이 되는 동안 아버지의 시와 딸의 글씨가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의 ‘추억’을 위해 ‘악몽’을 견딘 사람들이 섬을 마주하며 살고 있었다.

1976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이 저도 별장 주변을 산책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76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이 저도 별장 주변을 산책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저도의 추억’이 말하지 않은 것

“저 섬, 저 바다….”

정박한 군함 두 척에서 해군 병사들이 함상 정리에 분주했다. 섬 주위로 근접하는 어선을 병사들은 경계했다.

“그렇게 서명하고, 그렇게 탄원하고, 그렇게 청원해도, 그렇게 무시해 쌓더마는.”

배가 부두를 우회하자마자 신식 콘도 건물이 군사시설과 민간시설의 경계를 흐리며 이질의 경관을 구성했다. 군용 트럭과 소방차가 둑 위에서 대기했다.

“이젠 쫌 돌리도라.”

출렁이는 배 위에서 장정태(가명·58)의 말이 출렁였다.

“빼앗긴 섬과 바다를 우짜믄 다시 찾겄노.”

2016년 11월29일 펜스에 둘러싸인 대통령 저도 별장(2층 양옥)이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었다. 이문영 기자
2016년 11월29일 펜스에 둘러싸인 대통령 저도 별장(2층 양옥)이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었다. 이문영 기자
11월29일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가 저도 방파제를 낮고 부드럽게 때렸다. 모래를 걷어 올린 초겨울 해변이 방파제 사이에서 단출했다. 오른쪽에 위치한 탈의실과 샤워장 건물이 해변의 용도가 해수욕장임을 알렸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섬에서 잘 가꿔진 골프장이 말끔했다. 구불구불 휜 소나무 뒤로 경비용 펜스가 수직으로 삼엄했다. 펜스에 둘러싸인 대통령 별장(2층 양옥)이 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었다. 산등성이에 숨은 초소와 해안을 따라 설치된 감시카메라들이 바다를 향해 눈을 번득였다.

“대통령 추억 만들자고 말이지.”

장정태는 저도를 마주보는 땅에 살았다. 이름에 버드나무(柳)를 품은 유호마을은 바다로 튀어나간 바위언덕을 사이에 두고 상유마을과 하유마을로 나뉘었다. 저도는 하유마을(저도와 최근접 마을)에서 1.2㎞ 떨어져 있었다. 큰 섬(거제도)과 작은 섬(저도) 사이를 바다가 갈랐으나 유호마을과 저도는 한동네(유호리)였다. 바다 건너에서도 저도의 시설물과 군인들의 움직임이 육안으로 뚜렷이 확인됐다. 조상 대대로 저도가 생활터전이었던 유호마을 주민들은 갑자기 ‘군인 섬’이 돼버린 ‘돼지 섬’(猪島)을 볼 때마다 한탄했다.

“감옥 같은 시간을 견뎠다 아인교.”

저도는 43만8840㎡의 작은 섬이었다. 정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유호리 주민들은 선대로부터 전해 들었다. 일제가 강점하면서부터 섬의 평화는 주민들의 이삿짐에 실려 저도 밖으로 쫓겨났다. 일본군이 섬에 진주해 지하 벙커를 파고 통신소와 탄약고를 지었다. 광복 뒤엔 주한연합군이 물려받아 썼다. 1954년 해군이 접수한 뒤로 저도는 대통령 이승만의 휴양지가 됐다. 침략군에 점령되고 한국군에 점유되는 동안 30~50여가구(주민 기억마다 차이)가 섬에서 내몰렸다.

“마을에서 우리 집을 ‘도섬집’이라고 안 불르요.”

장목면 시방마을(유호리 옆동네) 주민 김경래(가명·67)는 안동 김씨다. “입거제 할아버지”(거제로 귀양 온 선조)는 그의 13대 선조였다. 그의 후손들이 저도에 들어가 뿌리내렸다. 저도에 살던 김경래의 직계 조부가 이승만 정권 때 섬을 나왔다. 섬에 있는 증조부의 선산은 옮기지 못했다.

“우리한테 무슨 힘이 있노. 나가라 카는데 안 맞아죽을라믄 나가야지 배기나.”

‘도섬(저도의 다른 이름)집’이란 호칭엔 실향의 상실이 바다 비린내처럼 배어 있었다.

박정희·박근혜의 대 이은 휴가지 저도
그들에게 ‘그립고 정든 섬’ 되는 동안
어민들의 말하지 못한 ‘악몽’ 같은 삶
일제 탄약창·이승만 별장에 쫓겨나고
박정희의 청해대 지정으로 군사 주둔

박정희가 직접 지휘하며 저도 재구성
별장 이층으로 올리고 해수욕장 ‘하사’
섬진강에서 모래 실어와 해변에 깔고
막내아들 지만 위해 매미 잡아 방사
군대 삼엄한 경계 속 추억 쌓은 가족

어린 시절 저도에서 동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가운데). <박근혜 자서전>
어린 시절 저도에서 동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가운데). <박근혜 자서전>
1978년 저도로 여름휴가를 간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현 대통령도 보인다. 국가기록원
1978년 저도로 여름휴가를 간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현 대통령도 보인다. 국가기록원
1960년대 후반까지 유호리 아이들은 소풍날 노 젓는 배를 타고 저도에 들어갔다. 장정태는 1967년 저도로 마지막 소풍을 갔다. 소나무 사이에 걸린 전선과 방공호가 일제의 흔적을 붙들고 있었다. 장정태는 저도에서 “보리똥”(보리수나무 열매)을 따먹고 숨바꼭질하며 놀았다. “엄청나게 굵은 구렁이가 보리똥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모습에 식겁”했다. 그해 아버지를 따라 저도에 온 박근혜(고등학교 1학년)는 해변에서 물놀이 사진을 남겼다. 그때까지 대통령 별장은 ‘기지장’이라 불리는 한 사람이 관리했다.

박정희 집권 중후반부터 저도 앞바다가 급변했다. 박정희는 1972년 저도를 대통령 여름별장(청해대)으로 공식 지정했다. 무장 군인들이 저도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훗날 박근혜 대통령이 ‘추억’을 쓴 저도 해변은 ‘해군전투수영장’이 됐다.

1974년 1월22일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린 ‘저도기지현황(중간보고)’. 국가 예산으로 조성하는 해수욕장을 청와대는 ‘각하 하사품’으로 표현했다. 대통령기록관
1974년 1월22일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린 ‘저도기지현황(중간보고)’. 국가 예산으로 조성하는 해수욕장을 청와대는 ‘각하 하사품’으로 표현했다. 대통령기록관
1974년 1월22일 청와대 총무비서관 임대지는 4장짜리 보고서(<한겨레>가 대통령기록관에 정보공개 청구·입수)를 만들었다. ‘저도기지현황(중간보고)’이란 제목으로 대통령 박정희에게 올렸다.

“저도의 조경사업 및 각종 시설물 건축공사와 각하께서 하사하시는 해군전투수영장 공사의 진척 현황을 중간보고합니다.”

저도 별장 공사 박정희가 지휘·결재

입구 전면(1973년 12월29일 완료).
해송·벚꽃·종려나무 172본.
목초파종 800㎡.
석축 70m.

어느 위치에 어떤 나무를 심었는지부터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조경은 저도 입구의 전면과 좌우(향나무·소나무를 종려나무로 대체), 수행원 건물 주변(가이스카향나무 12본, 옥향나무 10본, 벚꽃나무 4본 등), 골프장(히말라야시다 6본, 종려나무 4본) 주위에 집중됐다. 4곳에 벙커가 구축됐고, 3곳에서 초소가 완공됐다. 135m의 부두와 35000g/l 용량의 정수 탱크 공사 상황도 포함됐다. 국가 예산으로 조성하는 해수욕장을 청와대는 ‘각하 하사품’으로 표현했다. 해수욕장 공사는 별도 항목으로 구별해 보고했다.

“토지 매입 1973년 10월20일 완료. 비치하우스 기초 축조 11월20일 완료. 건물 축조 50% 완료. 조경 및 미화작업 1974년 4월15일까지 완료 예정.”

2월4일 박정희는 서명·결재했다. 별장과 장병 숙소, 군함 계류시설 등의 정비·구축 현황을 그는 직접 보고받고 챙겼다. 대통령 가족이 쓸 별장 공사를 대통령이 진두지휘했다. 입맛에 맞게 재구성된 섬에서 박정희 가족은 여름마다 ‘추억’을 쌓았다.

하유마을 한정례(가명·80)의 집은 저도를 정면에서 대면했다. 날이 밝으면 바다를 건너온 저도의 전경이 햇빛에 실려 집 유리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한정례는 저도에서 살았던 주민 중 유일한 생존자다. 스무 살에 하유마을로 시집왔을 때 그의 시아버지는 배를 타고 저도로 ‘출퇴근’했다. 저도에 시아버지가 일궈온 논밭이 있었다. “일제 때부터 얻어맞으면서도 섬을 포기하지 못했던”(상유마을 주민 설명) 시아버지는 섬에서 나온 뒤에도 매일 섬을 찾았다. 1950년대 말 한정례 부부와 시숙 부부는 시아버지를 따라 저도로 살림을 옮겼다. 민간인이 내몰린 섬으로 들어가 일본군 막사에 온돌을 놓고 살았다. 한정례 부부는 버려진 땅에서 농사를 지었고, 시숙 부부는 바다에서 머구리와 해녀가 됐다. 저도 해안은 그물에 상어가 걸릴 만큼 “고기가 너무 많아 썩을 지경”이었다. 7남매 중 5남매를 저도에서 낳았다.

1976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저도 해수욕장에서 수행원들과 수영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76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저도 해수욕장에서 수행원들과 수영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70년대 초 섬에 주둔한 군인들의 밥을 한정례와 ‘형님’(동서)이 해줬다. 톳을 따러 간 해안 절벽 아래서 ‘머리 없는 시체’를 발견해 군인들에게 신고하기도 했다. “신원조회해서 별장 쪽으론 얼씬도 못하게 막고 ‘행사’(1973년 박정희의 저도 휴가)를 치를 때까지” 그랬다. ‘행사’에 온 박정희는 산책을 하거나 수행원들과 해변에서 수영했다. “육영수 어머니(박정희 장모)도 섬에 왔던” 것으로 한정례는 기억했다. 저도는 물이 귀했다. 저수지가 없어 “하늘물”에 의지해 농사를 지었다. ‘첫 행사’ 때 대통령 가족 씻을 물이 부족했다. 한정례 가족이 머리에 물을 이고 샤워장으로 날랐다.

‘첫 행사’ 전후 본격적인 청해대 조성 작업이 시작됐다. 해군 경비정이 섬 주위를 오가며 삼엄하게 감시했다. 단층짜리 대통령 별장은 이층으로 올렸다.

“원래 섬에 매미가 별로 없었다꼬. 지만이 재밌으라고 육지에서 매미를 잡아다 안 풀었나. 백사장 모래도 매년 여름마다 육지에서 싣고 와서 뿌린 거라. 여름 지나면 다시 걷어올리뿌고.”

청와대는 9홀 규모의 골프장도 조성했다. 부부의 논밭이 골프장 부지로 수용됐다. 골프장 터를 닦으며 군인들이 불을 놓았다. 선조들 묻힌 산에서 연기가 일어 섬 전체에 자욱했다. 일본군 벙커는 골프장 공사 배수로로 쓰였다.

부부는 ‘저도 퇴거’를 명령받았다. 퇴거 전 골프장 인부들 함바집을 하며 번 돈으로 유호리에 집을 얻었다. “대통령 행사”를 한번 치른 뒤 섬을 떠난 한정례 부부는 해군으로부터 도선 업무를 받아 휴가 병사들을 섬 안팎으로 실어날랐다. 전화도 없던 때 저도에서 불을 피우면 남편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배를 띄웠다. 골프장에 삶터를 내준 한정례는 매년 마을 할머니들과 저도로 들어가 골프장 잡초(지난해 일당 4만8천원)를 뽑고 있다.

청와대는 저도의 ‘물 부족’ 해법을 모색했다. 총무비서관 홍승완은 1974년 9월17일(저도 지하수 조사계획), 1975년 2월25일(지하수 조사 결과보고), 1975년 6월27일(지하수개발 결과보고) 세 차례에 걸쳐 지하수 확보 방안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수질 조사 일정, 생활용수 적합성, 현장 노동자 투입 인원, 사용 인건비 내역까지 박정희가 세세하게 살피고 결재했다.

마지막 보고 3개월 뒤(1975년 10월1일) 거제에 속했던 저도가 진해로 넘어갔다. ‘청와대 시설보호와 작전 보안’을 이유로 당시 해군 작전사령부가 있던 진해시(1993년 12월1일 거제로 환원)가 관할 행정구역이 됐다. 거제 장목면 주민들은 저도를 앞에 두고 거제와 진해 사이에서 경계를 잃었다.

증개축한 대통령 별장은 300㎡ 규모가 됐다. 경호원실(66㎡), 관리요원실(16㎡), 장병숙소(6203.19㎡) 등도 들어섰다. 저도의 92.6%(40만6414㎡)를 현재 국방부가 소유(3만2426㎡는 경남도 관할)하고 있다.

2016년 11월29일 펜스에 둘러싸인 대통령 저도 별장(2층 양옥)이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었다. 이문영 기자
2016년 11월29일 펜스에 둘러싸인 대통령 저도 별장(2층 양옥)이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었다. 이문영 기자

군경에 점령돼 감옥이 된 마을

“그러니까 전쟁이었다 아입니꺼.”

상유마을 어민 석칠준은 그때를 “전시”로 기억했다. 물과 땅과 산에서 주민들은 삼중으로 감시당했다. 해군 군함들이 출동해 유호마을 앞바다를 에워싸 봉쇄했다. 동네 골목과 방파제마다 경찰이 깔려 주민들을 통제하고 검문했다. 산 위 임도엔 육군 병사들이 배치돼 거총했다. 박정희의 여름휴가 일정이 잡히면 유호리는 군경에 점령당했다. 대통령이 ‘뜰 땐’ 특공대도 나타났다. 서울에서 내려온 수도방위사령부가 전체를 통솔했다. 무장한 그들이 마을 주민보다 많아졌다. 주민들은 군경에게 마을회관을 내주고 집집마다 밥도 해먹여야 했다.

“우리한텐 ‘난리’였다꼬요. 대통령 가족이 노는데 와 우리가 매년 난리를 치러야 한단 말이고.”

유호리가 ‘청와동’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서울 인왕산 아래 ‘푸른 기와’가 거제도 끝마을까지 드리워 일상을 흔들었다. 현직 대통령과 미래의 대통령이 저도에서 아름다운 기억을 가져가는 동안 ‘대통령님 쉬시는 마을’ 사람들은 숨죽이며 전쟁을 겪었다.

“고기 잡아 팔아묵고 사는 어민들이 바다엘 몬 나갔다카니까.”

홍철구(가명·63)가 포구에서 그물을 고치며 말했다. 그들의 ‘행사’가 끝나기 전까지 어민들은 배를 띄우지 못했다. “대통령 휴가 보름 전, 대통령 휴가 기간, 대통령 귀경 뒤 군 장성 휴가까지” 주민들은 생업과 생활을 빼앗겼다. 조업 시기를 놓치면 한 해 수입이 썩은 갈치 토막처럼 잘려 나갔다.

“대통령 온다카믄 한 달 넘도록 우린 감옥에 처박히는 기라. 등화관제까지 당했다꼬. 밤 9시 되믄 불도 몬 쓰고(못 켜고) 집 밖에도 몬 나갔다 아이요. 그 피해를 우얄끼고.”

권력은 언어의 의미를 규정하고 쓸모를 독점하려는 욕망과 닿아 있다. 권력이 묻어버린 “전쟁” “난리” “악몽” “감금”이 ‘추억’의 뒤편에서 아우성쳤다.

1977년 유호리에 살던 김경래와 아내는 자택 출산했다. 아들의 탯줄을 소독하지 않은 가위로 잘랐다. 파상풍으로 영아 사망이 잦던 시절 그의 갓난 아들도 “죽기 직전”까지 갔다. 부산의 병원으로 다급히 옮겨야 했으나 ‘대통령 휴가’가 배의 출항을 막았다. “뱃길로 2시간이면 닿는 부산을 택시로 통영·마산의 병원들을 돌고 돌아 거의 하루 만에 도착”했다.

“기(어) 올라와.”

경비정 위에서 젊은 군인이 늙은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반말로 명령했다.

“느그 집 쥐새끼는 위아래도 없나.”

청해대 조성으로 강제퇴거된 생존 주민
골프장 건설로 섬 나와 골프장 풀 제거
대통령 휴가마다 유호 주민들은 ‘전쟁’
저도서 조업하는 어민 폭행하고 사격
‘개패듯 맞고’ 골병으로 사망한 주민도

견디다 못한 어민들 ‘저도 상륙 시위’
청해대 해제 뒤 군 장성 놀이터 전락
30년 넘는 주민들 ‘저도 반환’ 요구에
해군 “군사적 요충지” 강변하며 거부
최순실 사태 맞아 반환운동 다시 시작

지난 11월3일 거제시발전연합회는 장목면사무소에서 “저도를 국민 모두가 이용하는 국민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거제시로 소유권과 관리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거제시발전연합회 제공
지난 11월3일 거제시발전연합회는 장목면사무소에서 “저도를 국민 모두가 이용하는 국민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거제시로 소유권과 관리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거제시발전연합회 제공
아들 장정태가 항의하며 어선에서 뛰어올랐다. 경비정에 발을 딛는 순간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의식을 잃은 그는 어디론가 끌려가 구타당했다.

저도 북서~남서 해안은 겨울 북풍이 불어닥치는 반대쪽에 있었다. 암초와 모래펄에 물고기가 산란하는 거제·진해 바다의 핵심 어장이었다. 멸치들을 잡아먹으며 8월말부터 11월 중순까지 삼치들이 몰려들었다. 12월부터 호망을 내리면 대구가 떼로 걸리는 풍요로운 바다였다. 청해대 지정 뒤 그 바다가 군사구역으로 묶이면서 고기잡이가 금지(저도 해안선 3.9㎞ 중 약 1.9㎞)됐다. 해군은 저도와 중죽도(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사이에 바지선을 띄워 해상 검문소를 설치했다.

물고기는 정물이 아니라 생물이었다. 흐르는 물고기를 쫓으며 어선들도 저도의 남과 북이 서에서 만나는 해안(대통령 별장이 위치)으로 흘러갔다.

“정선(停船)! 정선!”

저도 쪽으로 접근하면 고속 경비정들이 “정선”을 외치며 배를 세웠다. 어민들을 경비정으로 올라오게 해 나이 불문하고 폭행했다. 강제 양망(그물을 걷어올림)시킨 어선들을 검문소로 끌고가 ‘2차 빠따’를 쳤다. 무릎을 꿇리고 물을 끼얹기도 했다. “사람이 한겨울 동태처럼 얼어붙으며” 인간의 자존도 얼어붙었다.

“유호마을 남자들 중 ‘빠따’ 안 맞은 사람이 어딨노.”

홍철구는 “열아홉살부터 맞았”다. 새벽 조업 중인 그의 배로 해군들이 뛰어내려 그를 구타했다. 경비정으로 끌고 가 쇠파이프를 후려치며 “오늘부터 작전구역 됐으니 더는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청해대로 지정되던 해였다. “개 패듯 패는” 군인들에게 맞아 팔이 부러졌다.

해군은 어선을 향해 총을 쏘기도 했다. “M16으로 드르륵 갈긴 총알에 맞아” 배의 전등이 깨졌다. “야광탄이 일렬로 달려들 땐 이러다 죽겠구나”(홍철구) 싶었다. 유탄에 맞은 주민도 있었다. 장정태의 친구가 갈빗대에 총을 맞아 피를 흘렸다.

어로제한구역을 자주 넘은 상유마을 주민이 있었다. “금수가 두들겨 맞듯 무자비하게” 맞았다. 폭행 뒤 다리를 심하게 절던 그는 쉰 살 즈음 세상을 떴다. 그의 죽음 원인을 유호리 주민들은 ‘골병’에서 찾았다. 그들의 ‘전쟁’ 위에 지어진 “행복의 보금자리”에서 박정희 가족은 “오붓하게 즐겼”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했다.

때마다 여름이면
그대와 함께 이 섬을 찾았노니
모든 시름 모든 피로 다 잊어버리고
우리 가족 오붓하게
마음껏 즐기던 행복의 보금자리
추억의 섬 저도(박정희 ‘저도의 추억’)

취임 뒤 첫 여름휴가를 떠난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7월 저도에서 산책하고 있다. 최순실이 지휘 아래 선별 공개된 사진이란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박근혜 대통령 페이스북
취임 뒤 첫 여름휴가를 떠난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7월 저도에서 산책하고 있다. 최순실이 지휘 아래 선별 공개된 사진이란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박근혜 대통령 페이스북
2013년 7월 저도에서 여름휴가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때 조성한 해수욕장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 페이스북
2013년 7월 저도에서 여름휴가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때 조성한 해수욕장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 페이스북

박근혜-최순실-김기춘의 저도

견디다 못한 유호리 어민들은 1990년 ‘저도 상륙 시위’를 벌였다. 영유아와 거동 힘든 노인을 뺀 전 주민 300여명이 배를 타고 저도로 올라갔다. 학교에 보내지 않은 아이들을 섬에서 뛰어놀게 하며 어른들은 집단 야영을 시도했다. 저도를 지배한 ‘공포의 파고’는 노태우 정권 후반에 와서야 수위를 낮췄다.

박정희 이후 저도 별장을 ‘상용한’ 대통령은 드물었다. 노태우는 저도 해변으로 연예인들을 불러 공연을 즐겼다. 1999년 7월 저도에 휴가 온 김대중이 군함을 타고 다도해를 둘러보는 사진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명박은 인근 구영해수욕장(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으로 나가 회를 먹고 식당 주인과 사진을 찍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저도 대통령 별장의 ‘청해대’ 해제 당시 해군이 32년만에 처음 공개(4월2일)한 저도의 대통령 별장. 1993년 4월3일 <경향신문>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저도 대통령 별장의 ‘청해대’ 해제 당시 해군이 32년만에 처음 공개(4월2일)한 저도의 대통령 별장. 1993년 4월3일 <경향신문>
저도가 속한 장목면(36.92㎢)에서 현대사에 기록될 두 사람이 태어났다. 대계리 출신 김영삼은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청해대를 해제했다. 청해대 지정과 저도의 진해 편입으로 말소된 어업권을 주민들은 그해 ‘절반’만 돌려받았다. ‘작전이 있을 땐 조업을 금지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었다. 저도에 설정된 군사구역은 유지됐다. 대통령 별장도 자리를 지켰고, 해군의 점유도 계속됐다.

김영삼 생가에서 5㎞ 떨어진 시방리는 김기춘의 고향이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 취임 뒤 전국의 지관들이 버스를 대절해 시방리를 찾았다. “이 작은 마을에서 김기춘처럼 잘나가는 사람이 나는 건 집터 때문이라며 동네를 둘러보고 갔다”고 시방리 주민은 전했다. “정작 지관들이 엉뚱한 사람 집을 지목해 ‘김기춘 집터 참 좋다’고 상찬해” 마을 사람들이 웃었다.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의 저도 휴가가 끝나자마자 비서실장이 됐다. 그를 임명한 청와대 인사 개편은 ‘저도 구상’이라 불렸다. 아버지의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김기춘이 추억 밖으로 나와 아버지의 통치 전략을 딸의 시대에 이식했다. ‘박근혜-최순실 공동정부’의 서막을 알리는 장면이 저도에서 연출됐다는 사실에 장목 주민들은 기막혀 했다. 저도는 박정희·박근혜 정권의 명멸과 최순실·김기춘이 하나로 꿰이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

“저길 봐요. 저도를 내놓지 않는 해군의 논리가 말이 되는지.”

저도가 내려다보이는 산간 도로에서 김해연(현 경남미래발전연구소장)이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도 안 시설물들이 훤히 관찰됐다. 거가대교가 저도 위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위성사진으로 본 저도 전경. 섬 위로 거가대교가 지나간다. 군사시설이란 이유로 대통령 별장과, 콘도, 콜프장 등이 지워져 있다. 아래 작은 사진에선 지워지지 않은 골프장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성사진으로 본 저도 전경. 섬 위로 거가대교가 지나간다. 군사시설이란 이유로 대통령 별장과, 콘도, 콜프장 등이 지워져 있다. 아래 작은 사진에선 지워지지 않은 골프장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유호리와 장목면 주민들은 ‘저도 반환’(작전통제 해제)을 30년 넘게 요구해왔다. 1988년 ‘유호리민 일동’은 국방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이듬해엔 장목번영회가 1274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12월 국방위원회 ‘상정 불가’ 의결)에 전달했다. 1993년 장목 어민들은 선단을 꾸려 해상시위를 벌였고, 2004년엔 거제시민 3만5천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 등에 건의했다. 이명박 정부 때도 청와대 탄원과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 접수(2011년)를 계속했다. 2003년 김해연(전 거제시의원·경남도의원) 등 거제시의원들이 진해 해군작전사령부를 찾아갔을 때 해군은 “군사 요충지”라며 작전구역 해제를 거부했다.

“적이 마음만 먹으면 조준사격이 가능할 만큼 뻥 뚫려 있어요. 대통령 별장도 나무 사이로 보입니다. 해군 설명은 사실과 달라도 한참 달라요. 해군이 저도 통제권을 내놓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김해연)

2010년말 개통한 거가대교는 시공사(대우건설)가 콘도 시설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저도 위 통과가 허용됐다. 2013년 이곳에서 당시 최윤희 해군참모총장 부인 등 40여명이 모여 ‘춤 파티’를 연 사실이 지난 국정감사에서 공개됐다. 이문영 기자
2010년말 개통한 거가대교는 시공사(대우건설)가 콘도 시설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저도 위 통과가 허용됐다. 2013년 이곳에서 당시 최윤희 해군참모총장 부인 등 40여명이 모여 ‘춤 파티’를 연 사실이 지난 국정감사에서 공개됐다. 이문영 기자
2010년 말 개통한 거가대교는 민간자본(대우건설)으로 건설됐다. 해군은 콘도 시설(3531㎡)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다리의 저도 위 통과를 허용했다. 작전지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콘도가 군 장성과 그 가족들의 휴가지로 활용되고 있다. 2013년 8월 그 콘도에서 벌어진 일이 3년 뒤 국정감사(지난 10월 김종대 정의당 의원 공개)에서 드러났다. 당시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이후 2015년 10월까지 합참의장 역임) 부인 등 40여명이 모여 ‘춤 파티’(해군은 “영화 <연평해전> 제작비 모금에 기여한 장성 부인들을 위한 자리”라고 해명)를 열었다. 그들의 파티를 위해 군 예산과 군함(수송)이 지원됐고 사병들이 동원됐다.

“청해대 해제되고 세상이 바뀌었으믄 섬을 주민들한테 돌려줘야지 와 군인들이 놀이터로 쓴단 말이요.”(김봉기 외포발전협의회장)

군사구역이 유지되면서 저도 앞바다엔 양식장 설치·이설도 불가능하다. 장목면에선 해군 동의 없인 3층 이상 건물을 지을 수도 없다.

“저도를 코앞에 두고 우리가 언제까지 이래 살아야 하겠습니꺼.”(박명관 거제시발전연합회장)

지난달 초 거제시발전연합회는 “저도를 국민 모두가 이용하는 국민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거제시로 소유권과 관리권을 이양해야 한다”며 결의대회를 열었다.

2013년 여름 해군 함정이 저도 앞바다를 순회했다. “작전 기간 동안 조업을 중단해달라”는 방송을 내보내며 해상을 통제했다. 유호리 어민들은 ‘누군가의 행차’를 직감했다. 며칠 뒤 박근혜 대통령이 다녀갔다. 아버지처럼 ‘저도의 소회’를 글(페이스북)로 남겼다.

“늘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자태는 마음을 사로잡는다. 복잡하고 힘든 일상을 떠나 마음을 식히고 자연과 어우러진 백사장을 걸으며….”

그 “평화” 뒤에 어민들의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거나 눈감았다. “복잡하고 힘든 일상을 식히러” 올 때마다 파괴돼온 삶들이 부녀 대통령의 정치엔 감각되지 않았다.

“우리 같은 바다인생은 바닥인생 아인교. 지금껏 계란으로 그리 바위를 쳐쌌는데도 안 되더란 말이요. 이제 어데다 하소연을 해야 되겄소.”(장정태)

‘바다(닥)인생들’이 30년 묵은 저도 반환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거제/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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