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영욕의 인생
1997년 정치입문 보수 ‘구원투수’로
이명박 정부 때는 여당 내 야당 역할
첫 부녀 대통령 올랐으나
무능함 이어 최순실 국정농단
파면 뒤 21일 만에 구치소 수감
1997년 정치입문 보수 ‘구원투수’로
이명박 정부 때는 여당 내 야당 역할
첫 부녀 대통령 올랐으나
무능함 이어 최순실 국정농단
파면 뒤 21일 만에 구치소 수감
“약속을 반드시 실천하는 민생대통령이 돼서 여러분이 기대하시던 ‘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2013년 2월25일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국민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 받겠습니다” (2017년 3월21일 검찰조사에 앞서)
국민들 앞에서 ‘민생 대통령’, ‘통합 대통령’을 다짐했던 박 전 대통령은 4년3개월 만에 뇌물수수 등 13개 혐의를 받는 피의자로 전락해 31일 구치소에 수감됐다. 부모를 총탄에 잃은 대통령의 딸이 첫 여성 대통령, 부녀 대통령에 올랐다는 드라마는 결국 비극으로 종영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정치에 입문, 야당 대표를 거쳐 첫 여성 대통령에 오르는 동안 항상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서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되며 보수의 신화로 자리매김해왔다. 박 전 대통령을 향한 일방적인 ‘동경’과 ‘환멸’ 모두 박 전 대통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재료로 활용됐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뒤 청와대를 떠났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초선의원 3년차이던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고, 2002년 미래한국연합을 창당해 9개월 동안 ‘외도’한 것을 제외하곤 언제나 보수정당의 중심에 서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적이 없는 그가 화려하게 정치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산업화 세대의 박정희 향수, 대구·경북(TK)를 기반으로 한 지역감정, 강력한 반공 정서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불법 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구원투수’로 당의 중심에 섰다. 당 대표로 등판한 그는 정당 역사상 유례없는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50석도 어려울 것’이라던 총선에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을 상대로 ‘40 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2006년 5월20일,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 11㎝가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병상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이 이후를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 대표로서 성과를 발판으로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지만 패했다. “경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선언하며 차기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양쪽의 갈등은 고조했다. 특히 2008년 4월 총선 때 김무성 의원 등 당시의 친박근혜계 인사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자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이명박-박근혜의 갈등은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정치 입문 이후 처음으로 반대연설까지하며 부결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고 충청권의 민심도 얻을 수 있었다.
‘여당 내 야당’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얻은 그는 2011년 12월, 당의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된다. 한나라당은 앞서 8월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무산과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어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되자, 박 전 대통령은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당의 전면에 등장했다.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외부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외연확장을 모색했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 역시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완전히 바꿨다. 당헌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가했다. 한나라당과 ‘다른’ 세력이라는 이미지 형성에 성공하면서,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어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다. 이후 2012년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하며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취임 뒤 잇따른 인사 사고와 불통 논란, 2014년 세월호 참사 및 2015년 메르스 사태로 ‘무능함’을 드러냈다. 임기 중반 이후에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여당 내 비박근혜계 지도부와 충돌을 빚었다. ‘레임덕’에 대한 불안은 박 전 대통령을 스스로 폭주하게 만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12·2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합의, 개성공단 폐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등 찬반이 첨예하게 맞붙는 사안을 밀어붙이며 ‘국론 분열’에 앞장섰다. ‘콘크리트 지지층’인 대구·경북과 60대 이상 고령층의 지지가 박 전 대통령을 뒷받침했지만, 지난해 가을부터 드러난 ‘최순실 국정농단’ 충격으로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5% 밑으로 추락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꺼풀씩 벗겨질수록 국민들은 경악했고, 수백만명의 촛불민심에 떠밀린 국회가 지난해 12월10일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후 92일 만인 지난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에게 파면선고를 내렸고, 검찰조사(3월21일)와 구속영장 청구(3월27일), 영장실질심사(3월30일)가 급박히 이어졌다. 30일 오전 굳은 얼굴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선 박 전 대통령은 결국 서울 삼성동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박근혜는 1974년 피살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6년 5월 20일 오후 서울 신촌 현대 백화점 앞에서 거리유세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갑작스런 괴한의 공격에 얼굴을 다쳤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29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를 마치고 돌아서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전 대통령이 30일 오후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영장발부여부를 기다리기 위해 검찰청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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