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국방·북한

벼랑에서 추는 춤, 공갈과 협상의 앙상블

등록 2021-08-09 14:41수정 2021-08-10 02:05

이제훈의 1991~2021 _09
1993년 6월11일(현지시각) 뉴욕. 미국이 “핵 포함 무력 사용·위협 배제, 자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을 약속하고, 북은 “(엔피티) 탈퇴 효력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만큼 일방적으로 임시 정지”하기로 한 ‘공동성명’ 합의 직후. 미국 수석대표 로버트 갈루치(맨 오른쪽)가 북 협상 단장 강석주(왼쪽 앞쪽 둘째 안경 쓴 이)한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고 있다. 사진 맨 왼쪽은 김계관이다. 충돌을 회피한 안도감 때문인지 북-미 대표단 모두 정말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6월11일(현지시각) 뉴욕. 미국이 “핵 포함 무력 사용·위협 배제, 자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을 약속하고, 북은 “(엔피티) 탈퇴 효력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만큼 일방적으로 임시 정지”하기로 한 ‘공동성명’ 합의 직후. 미국 수석대표 로버트 갈루치(맨 오른쪽)가 북 협상 단장 강석주(왼쪽 앞쪽 둘째 안경 쓴 이)한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고 있다. 사진 맨 왼쪽은 김계관이다. 충돌을 회피한 안도감 때문인지 북-미 대표단 모두 정말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강석주와 갈루치는 공동성명 발표 뒤 허종과 퀴노네스를 연락 창구로 지정했다. 저 유명한 ‘북-미 뉴욕 창구’의 시작이다. ‘핵 갈등’이 비등점으로 치닫던 93년 5~6월 북은 막다른 골목이다 싶을 때마다 ‘전화 외교’로 협상의 물꼬를 텄다. 헤이즐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북은 “미친 행위자”가 아니라, 자기 목표에 충실한 “합리적 행위자”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협상과 평화로 가는 길을 잃는다. 역사의 교훈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나라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로 부득이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1993년 3월12일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은 국제 비확산체제의 근간인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엔피티)의 울타리를 벗어나겠다는 초유의 공개 선언이었다.

그런데 북은 정확히 석달 뒤인 93년 6월12일 터질 ‘시한폭탄’을 멈출 방법도 함께 알렸다. “미국이 우리에 대한 핵위협을 중지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서기국(사무국)이 독자성과 공정성의 원칙으로 돌아설 때” 엔피티 탈퇴 선언을 철회할 수 있다고. 자신과 상대방을 벼랑끝으로 몰아가되 협상으로 가는 출로를 열어두는 북 특유의 ‘두 궤도 전략’이다.

92년 1월 “김정일의 남자” 김용순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부시 행정부와 달리, 갓 출범한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북의 초강수에 ‘협상’을 모색했다. 두 갈래 전략적 고려가 작용했다. 12년 만의 정권교체로 의욕적으로 일을 벌일 출범 초기 북핵 문제에 발목이 잡힐 생각이 없었다. 아울러 북의 엔피티 탈퇴로 비확산체제의 신뢰성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사태를 피해야 했다. 미국 패권의 핵심 기반인 국제 레짐의 신뢰성에 관한 문제여서다.

중국은 북과 거리를 뒀다. 93년 4월8일 북의 엔피티 탈퇴 선언에 유감을 표하며 핵안전조치협정 이행을 촉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에 찬성했다. 5월초 북의 엔피티 잔류를 촉구하는 유엔 총회 결의문은 찬성 140, 북한 홀로 반대, 중국은 기권. “공화국 정부의 자위적 조치에 지지와 연대성을 보내주리라 확신한다”는 북의 기대는 외면당했다.

북은 스스로 활로를 열어야 했다. “자, 자기가 부, 북한 대사라며 어떤 사람이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요, 이름이 허 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93년 5월 중순, 미국 국무부 코리아 데스크에서 15년간 일한 조앤이 놀란 표정으로 케네스 퀴노네스한테 전화를 건넸다. “나는 공화국 정부로부터 귀 정부에 양측 정부가 서로 만나 쌍방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넉달 전 애틀랜타 카터 센터에서 안면을 튼 허종 주유엔 북한대표부 대사였다. 퀴노네스는 상부의 승인을 받아 뉴욕 유엔본부에서 북의 김종수 대사를 만났고, 10분 만에 6월1일 주유엔 미국대표부에서 북-미 협상을 하기로 합의했다. 북의 대표는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퀴노네스는 “위기를 대화로 풀어간다는 차원에서 그(허종)가 전화를 걸어온 타이밍은 절묘했다”고 회고했다(<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 135~136쪽).

93년 6월2~4일, 사상 첫 북-미 정부 차원의 양자 협상은 평행선을 달렸다. 첫 만남에서 합의점을 찾기엔 “무지와 불신과 적대감”의 골이 너무 깊었다고 퀴노네스는 짚었다. 미국 수석대표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는 협상장을 떠나기 직전 북에 ‘상황을 재검토해보고 서로 협의할 게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말했다.

사흘 뒤인 6월7일 오전 10시 국무부 코리아 데스크의 조앤이 “켄, 어떤 북한 사람이 당신과 통화하고 싶다는데요”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 허종은 ‘가급적 빨리 뉴욕으로 와서 미국 정부의 기능과 관련한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퀴노네스는 뉴욕으로 갔다. 퀴노네스는 맨해튼 42번가 헴슬리 호텔에 숙소를 잡곤 길 건너편 2평짜리 베이글 가게에서 “평양에서 온 미스터 리”를 허종한테서 소개받아 며칠째 협상을 이어갔다. ‘미스터 리’는 퀴노네스한테 “안보와 주권”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쉼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엔피티 잔류가 미국에 그렇게 중요한가? 미국과 외교통상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뭘 해야 하나?”(<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 172~173쪽) 미 연방수사국(FBI)은 퀴노네스와 허종, 미스터 리의 ‘베이글 가게 협상’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퀴노네스가 ‘미스터 리’라 부른 이는 2018·2019년 북-미 정상회담에 깊이 관여한 리용호 전 외무상이다.)

북의 엔피티 탈퇴 선언 발효를 하루 앞둔 93년 6월11일 북·미는 사상 첫 ‘공동성명’을 합의·발표했다. 미국이 “핵 포함 무력 사용·위협 배제, 자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을 약속하고, 북은 “(엔피티) 탈퇴 효력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만큼 일방적으로 임시 정지”하기로 한 것이다. 강석주는 뉴욕 기자회견에서 “공동성명 발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사이에 처음 있는 일”이자 “역사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6월13일치 <노동신문>은 공동성명 전문을 1면에, 강석주의 뉴욕 회견을 “조미 쌍방이 핵위협을 하지 않으며 서로 상대방의 제도와 자주권을 존중할 데 대하여 합의”라는 제목을 달아 3면에 크게 실었다.

강석주와 갈루치는 공동성명 발표 뒤 허종과 퀴노네스를 연락 창구로 지정했다. 저 유명한 ‘북-미 뉴욕 창구’의 시작이다.

‘핵 갈등’이 비등점으로 치닫던 93년 5~6월 북은 막다른 골목이다 싶을 때마다 ‘전화 외교’로 협상의 물꼬를 텄다. 헤이즐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북은 “미친 행위자”가 아니라, 자기 목표에 충실한 “합리적 행위자”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협상과 평화로 가는 길을 잃는다. 역사의 교훈이다.

공동성명 채택 한달여 뒤인 93년 7월13일 스위스 제네바 북한대사관에서 2차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강석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사회가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경수로를 제공한다면 국내 원자로를 경수로로 대체해 원자력 개발 프로그램 전체를 수정할 용의가 있다.” 그 순간 미국 대표단의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은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저들은 핵문제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란다.” 강석주는 94년 10월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의 뼈대인 ‘영변 핵시설 동결↔경수로 제공’을 이때 공식 제안했고, 갈루치는 강석주가 “핵문제를 완벽하게 협상 대상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돈 오버도퍼·로버트 칼린, <두 개의 한국>, 431~437쪽).

2차 고위급회담 엿새째인 93년 7월19일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경수로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로 갈루치는 강석주와 합의했다. 다만 갈루치는 남-북, 북-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이의 “진지한 논의·협상” 개시를 3차 고위급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3차 회담은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다. 93년 11월7일 클린턴 대통령은 <엔비시>(NBC)의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에 나와 “북한의 핵폭탄 개발을 결코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며, ‘군사 대응’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엔비시>와 <월스트리트 저널> 공동 여론조사에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외교문제”로 꼽혔다.

추운 겨울, 북-미는 뉴욕 창구를 활용한 수십차례의 접촉 끝에 94년 3월1일 마침내 접점을 찾았다. ‘국제원자력기구 대표단의 영변 핵시설 방문·사찰, 94년 한-미 팀스피릿 훈련 취소, 남북 당국 회담’이라는 ‘주고받기’로 3차 북-미 고위급회담의 문을 열자는 데 뜻을 모았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와 여론, 김영삼 정부의 ‘압력’에 밀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과 남북의 특사 교환 성사’를 3차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다시 내걸었다.

미국이 ‘골대’를 옮긴 셈인데, 북은 판을 깨지 않았다. 그런데 두 전제조건이 치명적 위기의 발화점이 됐다. 94년 3월15일 국제원자력기구는 북이 추출한 핵물질이 핵무기로 전용되지 않았음을 검증하는 데 실패했다며 사찰단 철수와 함께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94년 3월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한 특사 교환을 위한 8차 실무대표 접촉’에서 ‘폭탄’이 터졌다. 날 선 말싸움 끝에 박영수 북쪽 단장(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이 “서울은 여기에서 멀지 않소,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뿐 아니라) 서울도 불바다가 될 것이오, 송 선생(송영대 당시 통일부 차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라며 회담장을 떠났다. 김영삼 정부는 ‘비공개’ 관례를 깨고 문제의 발언이 담긴 녹화 영상을 <한국방송>(KBS)에 건네 ‘반북 여론’에 불을 질렀다. 저녁밥을 먹고 느긋하게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남녘 시민들은 “서울 불바다” 발언에 뒤집어졌다.(남북 당국 회담은 고위급은 동영상·음성, 실무급은 음성을 서울·평양의 본부에서 보고 들을 수 있다. 훈령 전달 등 회담 진행 목적으로만 쓸 뿐 비공개가 불문율인데,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와 안전기획부는 이를 깼다.)

이제훈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평화를 위해 당당한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한겨레와 함께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야당이 박수 한번 안 쳐줬다’ 윤석열에…“국힘 데리고 북한 가라” 1.

‘야당이 박수 한번 안 쳐줬다’ 윤석열에…“국힘 데리고 북한 가라”

‘윤석열 앵무새’ 된 권성동 연설 “왜 계엄 내려졌냐면…” 2.

‘윤석열 앵무새’ 된 권성동 연설 “왜 계엄 내려졌냐면…”

문재인, ‘양심’ 읽으며 윤석열 ‘비양심’ 직격…“온 국민이 목도 중” 3.

문재인, ‘양심’ 읽으며 윤석열 ‘비양심’ 직격…“온 국민이 목도 중”

권성동 연설에 ‘민주당’ 45번 ‘이재명’ 19번…실소 터진 대목은 4.

권성동 연설에 ‘민주당’ 45번 ‘이재명’ 19번…실소 터진 대목은

윤석열 ‘북풍’ 부메랑…북한 ‘평양 무인기’ 국제기구 조사 요청 5.

윤석열 ‘북풍’ 부메랑…북한 ‘평양 무인기’ 국제기구 조사 요청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