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열린 76돌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하게 제도화하는 것이야말로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시 중구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한 ‘76돌 광복절 경축사’에서 “분단은 성장과 번영의 가장 큰 걸림돌인 동시에 항구적 평화를 가로막는 강고한 장벽”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문 대통령은 “올해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해”라며 “비록 통일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남북이 공존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통해 동북아시아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한반도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동독과 서독은 (1990년) 45년의 분단을 끝내고 통일을 이뤘다. 신의와 선의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았고, 보편주의, 다원주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독일모델’을 만들었다”며 “우리도 이 (분단의) 장벽을 걷어낼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이,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떨쳐내고, 사실상의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연결될 때 누릴 수 있는 이익은 막대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를 꿈꾼다면, 화해와 협력의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면”, “(분단의) 강고한 장벽이 마침내 허물어지고”,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새로운 희망과 번영이 시작될 것”이라며, 정세가 아무리 어려워도 “평화와 번영의 통일 한반도”라는 ’꿈’을 포기하지 말자고 호소했다.
이런 인식과 접근의 연장선에서 문 대통령은 ‘남북공존·한반도비핵화·항구적평화’라는 3개의 열쇠말로, 동북아 평화·번영에 기여하는 ‘한반도 (평화통일) 모델’을 제시했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8·15 경축사 계기에 그간의 언급을 총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한반도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문 대통령의 언급이 겉으로 드러난 ‘원론적, 장기적 비전’을 넘어서는 ‘구체적 복안’을 품고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일은 아니다. 예컨대 올해는 남과 북의 유엔 동시·분리 가입(1991년 9월17일),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13일)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년 12월31일) 합의 30돌이다. 문 대통령은 “올해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해”라고 ‘유엔 가입 30돌’만을 콕 집어 강조했다. 9월 유엔총회를 ‘한반도 모델’ 구상의 진전을 위한 외교 노력을 펼칠 무대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아 사용한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 모델’을 제시하며 거론한 ‘독일(통일)모델’을 북한 쪽은 ‘흡수통일’로 간주해왔다. 따라서 ‘독일 모델’에 대한 북쪽의 부정적 인식이 강해, 문 대통령의 이 언급에 북쪽이 반발할 가능성을 원천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이미 집권 첫해부터 ‘흡수통일 배제’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해온 터라 북쪽의 ‘오해’ 소지는 크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2017년 ’72돌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통일 3원칙’(북한 붕괴 불원, 흡수통일 불추진, 인위적 통일 불추구)을 공개 천명했고, 이후 남북의 ‘공존’과 ‘평화번영’에 무게를 실어왔다.
문 대통령은 이번 8·15 경축사에서 눈에 띄는 구체적 대북 제안을 내놓지는 않았다. 한·미 ‘후반기 연합지휘소훈련’에 대한 북쪽의 남북 직통연락 ‘불응’ 등 강한 반발로 구체적 대북 제안을 하기에 마땅치 않은 정세 흐름도 고려한 듯하다. 다만, “‘동북아 방역·보건 협력체’는 지금 정보공유와 의료방역 물품 공동 비축, 코로나 대응인력 공동훈련 등 협력사업을 논의하고 있다”며 “동아시아 생명공동체의 일원인 북한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백신 협력을 포함한 코로나19 대응 국제 공조·협력 참여를 북쪽에 에둘러 제안한 셈이다. 코로나19 공동 대응이 남북 모두에 절실한 과제이자, 한반도 정세의 장기 교착 와중에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판단이 깔린 듯하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6월14일 한-오스트리아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동의한다면 북한에 백신 공급을 협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집권 뒤인 2017년 이후 ’8·15 경축사’를 통해 내놓은 대북 언급을 살펴보면, ’반전반핵’, ‘공존’, ’평화경제’, ‘평화와 번영의 통일 한반도’ 따위의 열쇠말을 추릴 수 있다. 2017년 8·15 경축사에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의 전쟁’ 속에 한반도 전쟁위기 지수가 빠르게 높아지자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겠다”고 트럼프 대통령 견제에 나섰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8·15경축사에선 “남북관계의 발전이야 말로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시키는 동력”이라고 강조하며 △경기·강원 접경지역 통일경제특구 설치 △동아시아철도공동체 제안 등을 밝혔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한반도 정세가 거꾸로 흐르던 2019년엔 구체적 대북 제안 없이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광복을 완성하고자 한다”며 “늦어도 2045년 광복 100주년에는 평화와 통일로 하나된 나라(ONE KOREA)로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단단히 다지겠다고 약속한다”고 밝혔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북한 당국이 조중국경을 폐쇄하며 안으로 침잠한 2020년 8·15 경축사에선 “남과 북이 생명과 안전의 공동체임을 거듭 확인한다”며 방역협력, 공유하천 공동관리, 보건의료·산림협력, 농업기술과 품종개발 공동연구 등을 북쪽에 제안했다. 그러면서 “남북 협력이야 말로 남·북 모두에게 있어서 핵이나 군사력의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안보정책”이라며 “평화와 번영의 통일 한반도”의 꿈을 강조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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