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약속과 달리 공항 안으로) 통과시켜주지 않아서 (한국으로 오려는 조력자들이) 버스에 14~15시간을 갇혀 있었어요. 창문을 다 가린 버스 안에서, 에어컨도 없어 덥고, 아이들은 울고…하룻밤을 꼬박 새고 25일 새벽 동이 틀 무렵에야 버스가 공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얼굴이 사색이 돼서 (버스에서) 내려오는데…”
줌 화면 너머 김일응 주아프가니스탄대사관 공사참사관(공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27일 오전 1시간 넘게 진행된 외교부 출입 기자단을 상대로 한 화상 회견에서 김일응 공참은 절체절명의 긴박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는지 여러 차례 ‘울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26일(현지시각), 한국행을 꿈꾸며 아프간 조력자들이 통과한 공항 출입구 근처에서 대형 ‘자살폭탄 공격’으로 미군 등 다수가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하루 차이가 운명을 갈랐다.
김일응 주아프가니스탄대사관 공사참사관이 27일 오전 외교부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줌’을 활용한 회견을 통해 아프간인 조력자 390명을 한국으로 무사히 데려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줌’ 화면 촬영.
‘15시간 버스 감금’ 사태는, 공항 밖을 장악한 탈레반이 조력자들이 갖고 있던 여행증명서가 원본이 아닌 사본이라며 공항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아 발생한 것이다. 옥신각신 끝에 김 공참이 여행증명서 원본을 들고 공항 밖으로 나가겠다고 한 뒤에야 탈레반은 버스를 통과시켰다.
아프간인 조력자 390명을 한국으로 무사히 데려온 ‘기적 작전‘(Operation Miracle)은 아프간조력자-한국-미국-탈레반으로 엮인 소통 사슬의 한곳만 문제를 일으켜도 실패의 벼랑으로 떨어질 운명이었다. ‘살얼음판 걷기’가 아닌 과정이 없었다. 7개조로 나뉜 긴밀한 소통으로 조력자들을 미리 카불로 불러모았다. 공항 밖은 탈레반이 장악해 안전한 곳이 없었다. 공항에서 10분 거리에 버스 탑승 지점을 알렸다. ‘늦으면 안 되지만, (30분 이상) 너무 빨리 오지도 마라’가 지침. 탈레반 눈에 띄면 위험하니까.
카불 공항은 “시스템이 없었다”. 비행기만 뜨고 내릴 뿐, 상점도 아무것도 가동되지 않았다. 조력자들도, 이들을 도우려 카불에 다시 들어간 김 공참 등 한국인들도 먹지 못했다. “(모두들) 계속 굶었다, 나도 마찬가지고. 모든 걸 함께한다는 생각으로 서로 의지하며 버텼다.”
지난 15일 대사관 철수 ‘명령’을 받고 김 공참은 “순간 막막해졌다”. ‘우린 어떡하냐’는 조력자들의 물음에 “한국으로 데려갈 거고, 방법을 생각해서 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카불을 떠났다. 그리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다짐대로 다시 카불로 들어갔다. “(외교부) 본부로서는 (우리를 카불에 재진입시켰을 때 발생할지도 모를) 한국인 (인명) 피해도 우려할 수밖에 없는데 결심해줘 다행이었습니다.” “되든 안 되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김 공참은 ‘사지’로 돌아갈 수 있게 승인한 외교부 등 한국 정부의 결정을 ‘다행’이라고 묘사했다.
김 공참은 카불로 다시 들어간다는 사실을 가족한테 알리지 않았다. “걱정할까 봐”. 한국에 들어와 전화통화 할 때 두 딸이 “아빠 뉴스에 나오던데 카불 갔다온 거야? 아빠는 참…”이라며 살짝 질책을 했다고 전할 때 김 공참의 낯빛이 아주 환해졌다.
“모든 이를 데리고 올 수 있어 기분이 좋고, 이번 일로 ’아 우리가 선진국이 됐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김 공참은 “(이른바 선진국이 갖춰야 할) 국격과 책임”을 강조하며 “이번에 그걸 보여준 거 같아 가장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는 “옛 사람들이 왜 ‘생거진천’(진천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했는지 이번에 느꼈다”며 “(조력자들의 초기 체류를 받아들여준) 진천분들한테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어 “더 높아진 시민의식”을 짚고는, “이게 끝은 아니지 않나. 이분들이 잘 정착해서 한국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27일 낮 1시께 아프간 조력자 13명이 인천공항으로 추가 입국했다. ’미라클 작전’을 통해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한국에 온 아프카니스탄인은 모두 390명이다. 외교부는 “애초 발표는 391명이었는데, 명단에 없던 1명을 발견해 신원 확인을 담당하는 카불 미군에 신병을 인계해 실제 입국자는 모두 390명”이라고 설명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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