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5·26 남북정상회담에 참여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걸어 나오고 있다. 청와대 제공
“우리는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할 의사가 있다.”
2006년 11월18일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했다. 그리고 백악관 대변인은 회담 결과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 ‘종전선언’이 처음 언급된 순간이었다. 국내 언론은 이를 두고 “미국이 북한에 새로운 유인책을 제시했다”며 ‘부시의 하노이 선언’이라고 불렀다. 이를 근거로 지금도 종전선언을 최초로 제안한 당사자는 미국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웃픈’ 사연이 숨어 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종전선언’ 발언에 크게 주목했다. 북한은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를, 미국은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을 주장했는데, 평화협정에 앞서 종전을 선언하면 비핵화와 평화체제에 큰 추동력을 부여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노무현은 10개월 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부시를 다시 만났다. 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우리가 한국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 있을지 여부는 김정일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그다음 얘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시는 당황한 표정으로 “더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김정일이 핵무기를 폐기할 때”가 “한국전쟁을 끝낼 수 있는 날”이 될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한달 뒤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로 했다. 노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부시가 종전선언을 제안했다’고 설명하자, 김정일이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주 의미가 있다”며 화답한 것이다. 이로써 종전선언에 대해 남북미 정상들의 뜻이 모인 것처럼 보였다.
시작은 ‘웃프게’, 결말은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종전선언’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쓴 부시 행정부는 애초부터 이를 평화협정과 동의어로 간주했다. 그래서 비핵화 달성을 전제로 삼았다. 이에 반해 노무현 정부는 종전선언을 평화협정 이전에 하는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비핵화 완성 이전에, 비핵화 협상에 추동력을 부여해줄 것으로 믿었다. 애초부터 종전선언은 노무현 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오독한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미 간의 동상이몽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부시 행정부가 종전선언은 평화협정과 동일한 것이라며 “우리는 핵을 가진 북한과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그리고 2008년 2월에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면서 종전선언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이라는 화두를 다시 던졌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종전선언을 통해 비핵화와 평화체제에 탄력을 불어넣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번에는 10년 전의 혼란이 수습되었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에 앞서 하는 것으로 남북미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4·27 판문점 선언(2018년)에 종전선언 추진이 포함되었고,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를 환영한다고 했다. 같은 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선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에게 종전선언을 언약했다.
이로써 종전선언은 ‘택일’만 남은 듯했다. 북한은 정전협정 서명일인 7월27일로 날짜까지 잡았다. 그리고 7월 초에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이러한 입장을 전달했다. 하지만 폼페이오는 ‘선 비핵화’를 다시 꺼내 들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고 여긴 북한은 “우리가 순진했다”고 자책하면서 종전선언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고 했다. 지난 9월21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도 문 대통령은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즉 “한국전쟁 당사국들이 모여 ‘종전선언’을 이뤄낼 때, 비핵화의 불가역적 진전과 함께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며 국제사회의 협력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종전선언 가능성을 논의하는 데 열려 있다”고 했고, 중국은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종전선언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던 북한도 “앞으로 평화보장 체계 수립으로 나가는 데서 종전을 선언하는 것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며 고려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특히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종전선언을 두고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그렇다면 종전선언에 대한 당사자들의 공감대는 이뤄진 것일까? 아직은 아니다. 미국은 비핵화에 확실히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야 종전선언에 동의할 수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반면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거나 이게 담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한·미가 자신들의 군비증강은 정당한 것이고 북한의 군비증강은 “도발”로 규정하는 “이중 기준”을 버려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리고 극초음속 미사일을 화성-8형이라고 명명하고는 9월28일 첫 시험발사를 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도발”이라는 표현을 자제하면서 “유감”을 표했다. 어렵게 되살린 종전선언 추진 분위기가 저해돼서는 안 된다는 고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종전선언, 어떻게 결론지어질까
웃프게 시작된 종전선언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해피엔딩과 새로운 시작을 위해 몇가지 생각해볼 문제들을 던져본다.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을 추진해오면서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과 한-미 연합훈련을 계속한 것은 어울리는 짝인가?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고 법적으로는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것인데, ‘정치적 종전과 법적인 정전의 어색한 동거’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색한 동거를 빨리 끝내려면 종전선언이 비핵화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군비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이 비핵화에 우호적으로 나올까? 이러한 난제들을 풀기 위해 한-미 동맹이 내년 3월 연합훈련 유예를 조속히 선언하고 북한에 대화를 제안해보는 것은 어떨까? 대화를 통해 평화협정 협상 개시를 포함하는 종전을 선언하면서 비핵화 협상과 병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을 비롯한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