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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쉰살에 미 군정 훈련병 입대한 ‘공군 정신적 지주’ 최용덕 장군

등록 2022-05-31 21:35수정 2022-05-31 21:43

보훈처 ‘6월의 6‧25 전쟁영웅’ 선정
최용덕 장군의 제2대 공군참모총장 취임식 장면. 사진 공군박물관
최용덕 장군의 제2대 공군참모총장 취임식 장면. 사진 공군박물관

“우리가 500여명의 항공인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이와 같은 미 군정 당국의 제의를 수락하여 항공부대가 창설만 된다면 병이면 어떠냐,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정신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이등병으로 입대하는 것도 뜻이 있지 않느냐?”

‘공군의 정신적 지주’와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최용덕(1898.9.19~1969.8.15) 장군이 1948년 항공계 후배들에게 한 말이다. 해방 이후 공군 창설에 나섰던 최용덕 장군 등 국내 항공계 인사들은 미 군정에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항공부대 창설을 요청했다. 1948년 미 군정은 항공부대 창설 조건으로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이등병 신분으로 입교해 교육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당시 미 군정은 최용덕 장군 등 국내 항공계 인사들이 과거 일본군 항공대나 중국 공군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의 군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기초군사훈련을 다시 받으라고 한 것이었다.

과거 중국군과 일본군, 민간항공사에서 베테랑 조종사였던 국내 항공계 지도자들은 이런 미 군정의 요구에 대해 치욕이라며 분노했다. 중국 공군 대령 출신인 최용덕 장군은 당시 50살이었다. 최 장군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중국군, 광복군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다. 그는 1932년 2월 상하이에서 벌어진 중국과 일본 교전 때 전투기를 타고 공중전에 참전했고, 중국 공군기지 사령관을 지냈다. 김정렬(1917.9.29~1992.9.7)은 일본 육사를 나와 2차대전 때 일본군 전투기 비행 중대장을 지냈다.

하지만 공군 창설에 나섰던 국내 항공인 7명 가운데 최선임이었던 최용덕 장군은 후배들을 설득해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훈련병으로 입교했다. 1948년 4월 조선경비대 보병학교 교육을 마친 최용덕,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7인을 공군에서는 ‘공군 창설 7인의 간부’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다음 날인 1948년 8월16일 최용덕 장군은 국방부 차관에 임명됐다. 최용덕 장군은 국군 조직을 새로 짜면서 국군조직법 부칙에 ‘육군에 속한 항공병은 필요한 때에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넣어 공군 창설의 근거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49년 10월1일 창설됐다. 정부 수립이후 1년만에 육군에서 독립해 공군이 창설된 것은 당시 국내·외 상황을 감안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세계 최강인 미국 공군도 1947년 9월 미 육군에서 분리 독립했다. 1947년까지 미 공군은 미 육군 항공대로 미국 육군의 일부였다. 쉰살에 훈련병으로 다시 입대한 최용덕 장군의 백의종군이 발빠른 공군 창군의 든든한 밑돌이 된 것이다.

최용덕 장군. 보훈처 제공
최용덕 장군. 보훈처 제공

최용덕 장군은 일본군 출신이 많았던 국군 원로들과 달리 일제강점기 다양한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1916년 베이징의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중국군 초급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고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군에서 나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국내로 폭탄수송계획을 짜고 일제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열사 의거를 지원했다.

최 장군은 1920년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됐고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공군으로도 복무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대한민군 임시정부 광복군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최 장군은 중국에서 의열단원, 중국군, 임시정부 광복군 신분으로 하늘과 땅에서 20년 넘게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중국 공군 대령으로 복무하면서 임시정부의 광복군 소장으로도 활약하던 시절, 월급의 3분의 2를 광복군에 헌납하며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중국 군복을 입은 최용덕 장군. 사진 공군박물관
중국 군복을 입은 최용덕 장군. 사진 공군박물관

최 장군은 해방 후 귀국해 공군 창설에 헌신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 공군사관학교장에 임명된 그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 경비와 북한군의 김포반도 상륙 저지에 나섰다. 1952년 12월,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서 동해안의 전략요충지인 351고지의 근접항공지원작전을 주도해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하는 등 일선 전투를 이끌었다.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전역한 그는 체신부 장관과 주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1969년 8월15일 광복절에 영면했다. 부하들을 챙기느라 일흔 살까지 셋방살이를 면치 못했던 그는 별세할 당시 전 재산이 손녀에게 우유를 사주고 남은 거스름돈 240원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최 장군은 생전 공군 후배들에게 “우리의 살 곳도 하늘이요, 우리의 죽을 마당도 하늘이요, 우리의 일터도 하늘이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임종을 며칠 앞두고는 공군 후배들에게 “내가 죽거든 수의 대신 공군복을 입혀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국가보훈처는 31일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6·25전쟁에서 활약한 최용덕 대한민국 공군 중장을 ‘2022년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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