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은 지난 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이틀째 회의에 참석해 한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노리는 목적은 우리 정권을 붕괴시켜버리자는 것”이라며 “미국이 조성해놓은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형세하에서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9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한반도식 ‘공포의 균형 ’은 가능할까 ? 불가역적인 핵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한반도를 보면서 던져본 질문이다 . 미-소 냉전 시대에 유행했던 공포의 균형이라는 표현은 미국과 소련이 너 죽고 나 죽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과 이성에 대한 최저치의 호소였다 . 결과적으로 이건 아슬아슬하게 작동했다 . 혹자들이 냉전을 ‘긴 평화 ’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 그럼 미국 핵과 북핵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한반도는 어떨까 ? 이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한반도가 불가역적인 핵 시대로 들어섰다고 보는 이유부터 짚어보자 .
한국전쟁 때부터 “지속적이고 계획적이며 반복적으로 ” 있어왔던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상수 ’에 속한다 . ‘변수 ’는 북한의 핵무장 여부였다 . 그런데 길게는 30년 동안 , 짧게는 2018∼2019년의 협상을 거치면서 북한이 내린 결론은 대화와 협상은 ‘부질없다 ’는 것이다 . 이와 관련해 북한이 2019년 여름을 거치면서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그 이전 30년 가까이 북한의 핵심적인 목표는 북-미 관계 정상화에 있었다 .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을 거쳐 6월 30일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으면서 북한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 북-미 관계 정상화의 뜻을 ‘거의 ’ 접고 , 안보는 핵으로 , 경제는 자력갱생으로 , 외교는 중국과 러시아 중심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해오고 있다 .
상당한 성과도 거두고 있다 . 북핵의 고도화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 경제 역시 외부의 평가와는 달리 꾸준히 좋아지고 있을 공산이 크다 . 과거에는 북핵이 북-중 ·북-러 관계의 걸림돌이었던 반면에 , 최근 북한의 핵 질주에도 불구하고 북-중 ·북-러 관계는 1990년 이래 가장 좋아지고 있다 . 그 중심에는 북한이 “국체 ”로 부르는 핵무력이 있다 . 김정은 정권은 핵이 안보뿐만 아니라 재래식 군비 절감 및 군수 -민수 전환을 촉진해 경제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 적대국인 한·미·일을 상대로는 ‘억제력 ’이 되고 우방국인 중·러를 상대로는 ‘자주의 무기 ’가 될 수 있다며 , 핵무장을 통해 “전략 국가 ”가 되고 있다고 자신한다 .
북한이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법령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 ’를 채택한 것은 그 결정판에 해당된다 . 이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 정책을 법제화함으로써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의 지위가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다 ”고 천명했다 . 북한의 핵무장도 사실상 ‘상수 ’가 된 것이다 .
북한이 이 법령을 통해 밝힌 ‘핵무기 사용 조건 ’도 매우 공세적이다 . 우선 핵 사용 권한이 김 위원장의 독점적인 권한이라고 명시하면서도 그 조건으로 “국가지도부와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하였다고 판단되는 경우 ”를 명시했다 . 특히 핵 사용 명령권자인 김 위원장의 유고 시에 대비해 “사전에 결정된 작전방안에 따라 도발원점과 지휘부를 비롯한 적대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한 핵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에 단행된다 ”고 강조했다 . 이는 “북한의 핵 사용 징후 시 승인권자를 제거해 핵 공격을 막겠다 ”는 한-미 동맹의 참수작전에 대한 맞대응의 성격이 짙다 .
또 북한은 △핵 또는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한 경우 △국가의 중요 전략적 대상들에 대한 치명적인 군사적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한 경우 △유사시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필요가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경우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핵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도 핵무기 사용 조건들로 명시했다 . 핵무력의 임무를 억제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중대한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되면 선제공격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 다만 이러한 교리는 핵 선제 불사용을 천명해온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핵보유국들과 유사하다 .
주목할 점은 또 있다 . 북한은 가장 폐쇄적인 국가로 간주되어왔다 . 그런데 적어도 핵 정책을 보면 가장 구체적이고 투명한 입장을 밝혔다 . 이는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와 비교해도 명확해진다 .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3월 핵태세검토 (NPR) 보고서 작성을 완료했음에도 1쪽짜리 요약문만 공개했을 뿐 ,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까지도 함구하고 있다 . 이에 반해 북한은 핵무력의 임무와 사용 조건을 세세하게 열거하면서 이를 공개했다 . 왜 그랬을까 ? 그건 군사적 능력의 부족을 핵 사용 의지의 과시로 만회해 전쟁 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에 대응해 한·미도 대북 위협의 수준을 높이고 있다 . 9월 16일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 (EDSCG) 회의에선 “북한의 새로운 핵 정책 법령 채택을 포함하여 북한이 핵 사용과 관련하여 긴장을 고조시키고 안정을 저해하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 ”하면서 “북한의 어떠한 핵 공격도 압도적이며 결정적인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 이를 위해 “미국은 핵 , 재래식 , 미사일 방어 (MD) 및 진전된 비핵능력 등 모든 범주의 군사적 능력을 활용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 이를 과시하듯 핵추진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를 비롯한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도 잦아지고 있다 .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을 통한 전쟁 억제론은 믿을 만할까 ? 결론부터 말하면 미-소 냉전 시대보다 더 불안할 공산이 크다 . ‘대륙간탄도미사일 ’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과 소련은 5500㎞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반면에 , 한-미 동맹과 북한은 휴전선을 맞대고 있다 . 냉전 시대에는 사실상 엠디를 금지해 “국제 평화와 전략적 안정 ”에 기여한 탄도미사일방어 (ABM) 조약이 있었지만 , 한반도 안팎에선 한·미·일의 엠디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 한-미 동맹은 ‘고성능 망원경 ’으로 북한을 감시하고 있는 반면에 , 북한의 감시정찰 능력은 ‘안대 ’를 낀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첨단 정보자산을 갖추어도 인간의 오판과 오인 , 그리고 기계의 오작동으로 핵전쟁의 위험이 있었다는 것이 냉전 시대의 교훈이다 . 그런데 정보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북한이 어떻게 외부의 중대 공격이 “임박하였다고 판단 ”할 수 있을까 ?
미-소 냉전과 한반도의 상황을 비교할 때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 미-소는 1933년에 관계를 정상화했고 , 냉전 시기와 러시아가 소련을 승계한 이후에도 대사급 외교관계는 유지되어왔다 . 또 핫라인도 있어왔다 . 이러한 소통 구조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비롯한 여러 위기들이 핵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이에 반해 한-미 동맹과 북한 사이에는 이렇다 할 소통 구조가 없다 . 북-미 관계는 북한 정권 수립 이후 74년 동안 한번도 정상화된 적이 없고 , 남북관계도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 유사시 확전을 막을 수 있는 마땅한 대화 채널은 부족한 반면에 여차하면 상대방의 지도부를 제거하겠다는 신호는 넘쳐나고 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인 것이다 .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 한반도식 공포의 균형은 매우 불안정하다 . 대책은 이러한 불안을 직시하는 것에서 마련될 수 있다 . 우선 큰 전쟁을 초래할 수 있는 작은 충돌을 방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 윤석열 정부가 정파적 시각을 거둬내고 9·19 군사합의의 준수 ·발전 의지를 밝히고 북한도 이에 호응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 또 한반도식 핵전쟁 방지 협정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 이는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불편함 ’이 있지만 , 핵전쟁을 예방하는 데 기여한다는 절박한 ‘실용성 ’도 있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