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 카빈 소총 대한민국 1호 시제품. 전쟁기념관 제공
현재 한국은 전차, 자주포, 이지스 구축함, 초음속 전투기 등 대부분 무기를 국내에서 만들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당시 한국은 총과 대포는 물론이고 대검 하나 만들지 못했다. 심지어 소총 총구에 집어넣어 청소하는 꽂을대마저 미국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1954년 11월 한국과 미국은 한-미 합의의사록을 체결해, 한국은 미국 군사원조를 약속받는 대신에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관 관할에 두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20개 현역사단을 포함한 72만명의 한국군 병력을 유지하고 국군에 대한 보급과 장비를 책임지기로 약속했다. 한때 한국은 국방비의 80% 가량을 미국 군사원조에 의존했다. 1960년대까지 한국군은 미국의 군사전략에 따라 미국이 제공한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미군의 작전통제를 받았다.
1968년 1월 북한의 청와대 기습(1·21 사태), 1968년 10월, 11월 울진·삼척무장간첩 침투사건 등이 일어났고, 미국은 1969년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끼리’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71년 경기 동두천에 있던 주한미군 7사단도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당시 한국이 군인 5만명을 베트남에 파병해 미국을 도왔지만, 미국은 한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7사단 철수를 강행했다. 1970년 이후 미국의 무상 군사원조도 줄어들어, 국방비의 60% 이상을 한국이 부담해야 했다.
1971년 11월10일 박정희 대통령이 안보상황이 초비상 상태라며, ‘긴급병기개발지시’를 하달했다. 박 대통령은 예비군 20개 사단을 무장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개발·생산하라며 그해 12월30일까지 소총·기관총·박격포·로켓발사기 등의 1차 시제품을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 만든 무기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먼저 시제품부터 만들고, 차차 개량해나가면서 쓸만한 병기를 생산하라”고 했다. 당시 한국군 개인 기본화기는 미국이 만든 M1 소총과 M2 카빈 소총이었다. 당시 시제품 제작 사업 명칭은 ‘번개 사업’이었다. 번개처럼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는 개발자들의 복잡한 속마음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한다.
당시 국내 상황을 감안하면, 2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소총, 박격포, 로켓발사기 등의 시제품을 만들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경험은 당연히 없었고 산업기반, 기술, 장비가 없었다. 당시 국내는 무기개발의 기초인 금속, 기계, 전기, 전자, 화학 등 산업기반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무기생산과 관련있는 업체를 찾아보니, 풍산금속이 동전을 찍어 필리핀에 납품하고 있었고, 한국화약이 공업용 화약을 제조하고 있었고, 대동공업이 농기구를 만들고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직원들은 서울 청계천을 드나들며 각종 공구, 장비 등을 구했고, 소총의 도면이 없으니 실제 총기를 분해해 부품의 실물을 스케치했다. 역설계 방식이었다. 로켓발사기는 창틀을 만드는 알루미늄 주물로 제작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하루 24시간을 일해 한달 만에 소총과 박격포 시제품을 만들었다. 1971년 12월16일 청와대 대접견실에 최초의 국내 개발 무기 8종(M1 소총, M2 카빈소총, 기관총, 3.5인치 로켓 발사기 등)이 전시됐다.
이때 제작된 ‘M2 카빈총 대한민국 1호 시제품' 실물이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전쟁기념관에서 오는 30일 개막하는 ‘기밀해제-국군정보사령부 총기를 보다’ 특별전에서다. 이번에 공개되는 M2 카빈총은 당시 제작한 시제품 10정 가운데 하나로, 대한민국 자주국방 태동기를 대표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전쟁기념관이 설명했다.
이번 특별전에선 정보사가 장기간 보관해오다 전쟁기념관으로 이관한 총기 52점도 전시된다. M2 카빈총 시제품뿐만 아니라 마드센 경기관총(Madsen M1937) 중국 면허생산품, 이라크 타리크 권총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주력 총기부터 현대 민간 호신용 총기까지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총기를 만날 수 있다. 특별전은 내년 3월5일까지 이어진다. 전시 관람은 무료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