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북한이 미사일을 동원한 대규모 열병식을 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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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하여 두개의 ‘담대한’ 구상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하나는 북한 선비핵화론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 독자핵무장론이다. 두가지 모두 현실화 가능성이 ‘전혀’ 없어 유령과 같지만 때마다 출몰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어놓는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담대한 구상’은 북한의 비핵화를 기본 전제로 하여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해주고 나아가 정치군사적 상응조치까지, 과감하고 포괄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이미 버림받은 10년 전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으로서 전제 자체가 틀렸다”, “(남한 대통령) 그 인간 자체가 싫다”,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 등의 ‘막말’들이 돌아왔다.
모름지기 담대함이란 행동에 따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어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상대를 전혀 모르고 자신의 행동 자체를 능동적으로 시작도 못 하면서 생각만 담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담대함’이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자. 그것은 비겁함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한반도에서의 군사 대결과 전쟁 위기가 숨 가쁘게 고조되어온 연유가 그것 아닐까.
독자핵무장론은 선비핵화론보다 30년 이상 더 오래되었다. 북한의 국력과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던 1970년대 카터 행정부(1977∼81)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알려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핵 개발을 추진했다.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실체가 있었고, ‘죽임’을 당한 후 유령으로 남게 되었다.
지난달 30일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최종현학술원 의뢰)에서 국민의 약 77%가 ‘독자적 핵개발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5월 아산정책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도 70% 정도의 지지를 보였고 2021년 말에 미국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 결과 역시 71% 정도였다.(2022년 2월23일 <연합뉴스> 보도) 다른 여론조사들에서도 근년 들어 거의 모두 절반을 훨씬 넘는 응답자들이 독자 핵무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여론조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민 다수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핵 보유라는 매우 복잡하고 국가의 명운이 달린 사안에 대한 단순 찬반식 여론조사의 결과는 그 신뢰성과 효용성에 대하여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거에서의 호감도 조사가 아닌 정책에 대한 여론조사는 응답자가 과연 문제의 본질을 얼마나 아는지를 고려하여 설계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한국의 독자적 핵개발이 필요하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비전문가인 대부분의 일반인은 어떻게 답을 할까. 뻔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필요는 할 것 같다.’ 즉, ‘그렇다’이다. 특히 조사 시기에 북한 미사일 시험이 계속되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면 그 원인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 공포와 적대감정이 더 힘을 발휘할 것이다. 여기에 주권의식과 핵보유국의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욕망도 한몫할 것이다. 응답자들은 ‘무죄’다.
한국의 독자적 핵개발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이 사실적 논거를 통하여 ‘설파’했다. 미국의 반대와 한-미 동맹 와해, 한반도 비핵화 포기, 핵확산금지조약(NPT·엔피티) 탈퇴와 외교적 고립, 핵연료 공급 중단과 전력 대란, 전반적 경제제재, 핵 개발 비용과 핵시험 시설 마련, 재래식 분쟁의 핵전쟁화, 지역의 핵 군비경쟁과 안보 딜레마 심화 등의 문제는 단 한가지도 현실적으로 해결하거나 수용하기 불가능하다.
그래도 ‘담대하게’ 만난을 무릅쓰고 핵무장을 하더라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불량국가(rogue state)이자 경제가 망가진 실패국가(failed state)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남북한은 평화체제는커녕 영구분단보다 더 험악한 영구전쟁 체제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이면서 별로 시간도 안 걸리는 논의를 한 후에 설문조사를 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인식은 세계를 구성하고 세계는 다시 인식을 지배한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핵무장을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사회적 통념의 반영이면서 그것을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진짜 위험은 여기서 나온다. 그것이 정치와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북한의 도발 수위가 높아질 경우 “대한민국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최초의 ‘공개’ 발언이며 가히 북한 선비핵화론에 이은 ‘담대한 구상 제2탄’이라 할 만하다. 미국은 언급할 필요조차 못 느꼈을지 모르지만 ‘친절하게도’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본의가 아니라고 해명했으며 윤 대통령 자신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엔피티 체제를 존중한다”고 ‘소명’했다.
일부 민간 학자들의 독자 핵무장 주장이야 자유지만 책임 있는 정치인과 정책결정자들은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포퓰리즘의 유혹을 느낄 수 있겠지만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칫 국내의 사회경제적 악재들과 국제정세의 악화가 겹칠 때 전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윤석열 행정부가 높지 않은 지지율이나마 유지하기 위하여 남북 대결과 한·미·일 군사협력 중심의 냉전적 안보 포퓰리즘에 기대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기대하기 어렵지만 평화적 방법으로 평화를 구현하려는 담대한 구상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싶다.
남북한이 미국과 함께 ‘동맹’을 결성할 수 있다는 구상도 제시된 바 있지 않은가.(‘A Grand Bargain With North Korea’, <포린 어페어스>, 2021년 7월29일)
특정한 적을 상정하는 동맹이 아니라 포괄적 안보협력을 추구하는 ‘공동안보’ 체제를 남북이 주도하는 것이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도,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담대함이다.
전 국방대 교수. 노무현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 국방담당,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군사과학 기술의 이해> 등의 저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