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 기념행사에서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정부의 행보에서 역설적으로 새 시대의 징후를 읽는다.
윤석열 정부는 한국 사회가 또 다른 상태로 전환되기 위해 겪어내야만 하는 ‘통과의례’(rites of passage)라는 뜻이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구시대와 단절하고 미래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을 ‘통과의례’와 ‘리미널리티’(liminality, 문턱)로 개념화하였는데, 이는 기존 사회규범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지만 새로운 체계로의 전환도 이뤄지지 않은 중간 단계를 뜻한다.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 사회는 구체제로부터의 분리와 새로운 체계로의 이행 직전의 과도기가 혼재된 혼란과 고통의 시간 한복판에 있다.
한동안 나는 촛불혁명에 도취돼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를 ‘새 시대의 시작’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시민들이 부정의한 권력자를 평화적 방법을 통해 끌어내렸다는 사실에서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기대했던 까닭이다. 당시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지만 고질적인 갈등과 불평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분단체제로 인해 비대해진 국가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으며 소수 대기업에 집중된 경제 권력은 시민들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민의 삶이 국가와 기업에 종속돼 있는 근본적 모순은 민주화 이후 보수와 진보 정부가 차례로 등장했음에도 결코 해결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이 나서 권력자를 탄핵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일이며 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 분명했다.
하지만 구체제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지속된다. 게다가 단절해야 하는 구체제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대부분의 정치 세력과 사회적 습성 전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지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의 등장은 문재인 정부를 이끌었던 586 민주화 세대가 표상했던 가치의 몰락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곱씹어봐야 한다. 586 민주화 세대가 지향했던 규범과 실천 전반의 유통기한이 다했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진보 정부를 자임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자산 격차는 더욱 심각해져 불평등은 악화됐으며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는 충족되지 못했다. 정치·경제 분야에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에 상당한 공을 들임으로써 시민들의 진보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그 정부를 이끌었던 몇몇 상징적 인물의 도덕적 결함은 결국 민주화 세력 전반의 몰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은 심판투표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윤석열 정부의 등장은 지금껏 한국 사회의 주역 중 하나인 민주화 세력과 그들이 표상하는 시대적 소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윤석열 정부는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또 다른 권력, 즉 반공주의와 압축적 산업화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의 민낯을 폭로한다. 이들은 민주화 세대의 등장으로 위축되기는 했지만 재편된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에서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함으로써 여전히 엄청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내각에 이명박 정부 시기 관료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나 최근 정부의 노동조합 탄압, 친기업적 정책, 부자 감세, 미·일 중심의 외교 정책 등을 감안해볼 때 윤석열 정부의 주축이 어떤 집단이며 그들의 국가 운용 방향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자본의 논리와 경제 우선주의를 강조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워 국정을 운영하며, 자본에 걸림돌이 되는 집단이나 세력은 정치적 불순분자이자 친북 세력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축출한다. 민주화 이후 집권한 과거 보수 정부에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나마 야당과의 협치, 사회 통합, 그리고 친서민 정책 등을 강조했지만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마저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세계를 범죄자와 검사로 단순하게 파악하는 검찰 출신 윤 대통령의 사전에는 애초에 정치나 통합은 없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검찰과 감사원을 앞세워 대화의 상대를 폭력적으로 압박하고,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은 ‘좌파’, ‘빨갱이’,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는다. 반공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의, 그리고 선별적 법치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된 윤석열 정부의 국정 기조는 사회 곳곳에서 수많은 파열음을 내고 있으며, 정치 싸움꾼들의 날 선 목소리에 시민들의 비명 소리는 묻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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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세차게 칼을 휘두른다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공주의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간다는 것과 검찰이 정의의 사도임을 자처하는 것은 결국 반공주의가 그 어떤 반향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진실과 사법 권력의 부정의함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채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윤석열 정부는 형해화된 냉전 이데올로기와 법을 내세우는 권력 장치의 면면을 국민 모두가 경험하게 하는 중대한 계기임이 분명하다.
지난 주말 나는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내 다양성을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이 참여한 축제의 장이었다. 보수 기독교 집단뿐만 아니라 비우호적인 서울시 때문에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주변에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보수 단체의 집회도 열렸다. 그럼에도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한 수많은 시민들은 혐오와 배제의 목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혐오 발언을 따라하며 춤과 웃음으로 대응하는 ‘결기’까지 보여주었다. 각자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몸짓은 혐오와 적대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과 수많은 목소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피아를 구분하는 냉전 이데올로기나 처벌을 내세운 통치 장치들의 유한함과 무력함을 마주하게 된다. 민주주의·진보와 같은 거대한 윤리적 담론이나 반공주의와 결합한 선택적 법치주의 등이 포착하지 못한 꿈틀거리는 힘은 이처럼 사람들의 사이의 공명을 통해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비단 퀴어 퍼레이드만이 아닐 것이다. 풀뿌리 곳곳에서 전혀 다른 의식과 실천을 장착한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만나고, 소통하며 대안을 꿈꾸고 있다.
윤석열 정부를 통해 한국 사회는 비로소 반공주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소통·개입·협상과 같은 정치적 행위가 규율·통제·처벌이라는 법을 통한 지배보다 우선돼야 함을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통과의례’는 이토록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이라면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세계를 준비하며 함께 버텨야 한다. 기왕이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의를 넘어설 발칙한 상상을 하며 견디면 좋겠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영국 에식스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공회대, 싱가포르국립대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한 사회와 탈분단 문화를 연구하며, <갈라진 마음들> 등 다수 학술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