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기된 장성택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의 실각설이 사실이라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43)의 거취가 불안해질 거란 관측이 나온다. 장성택 부장은 국외를 떠도는 김정남에게 큰 버팀목이었던 까닭이다.
김 위원장의 첫 번째 동거녀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쓴 글을 보자. 글에 나오는 ‘할머니’(혜랑·혜림 자매의 어머니 김원주), ‘고모부’ 등의 호칭은 김정남의 관점이다.
“할머니는 그때 우리 집에 자주 오고 정남을 무척 사랑하던 고모부 장성택 과장을 크게 믿었다. 그는 할머니의 이런 진심을 깊이 동정하고 자기의 역할을 하겠다는 마음 지원을 표시했다. 그가 할머니의 편이 되어준 것은 제네바로 갈 수 있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할머니는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장성택 과장은 인간적인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장점과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장성택 과장이 솔선하여 지금 제네바 대사가 된 리철을 발탁하였고 그들은 선발대로 제네바에 먼저 들어갔다.”(<등나무집>, 389쪽)
김정일은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낳은 아들을 외부에 공개하기를 꺼렸다. 할머니(김원주)와 이모(성혜랑)가 집에서 교육을 맡았으나 한계가 있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사회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학을 추진했지만 김정일은 반대했다. 불안감 때문이었다. 결국 장성택이 발 벗고 나선 뒤에야 스위스 유학이 가능했다. 김정일로서도 가족인 장성택이 맡음으로써, 굳이 치부를 외부에 드러낼 필요가 없어졌다.
이한영(북한이름 리일남, 성혜랑의 아들)의 수기 <김정일 로열패밀리>를 보면 그 배경으로 짐작할 만한 대목이 있다. 장성택은 1978년께 김정일을 모방해 화려한 연회를 열다가 김정일에게 발각됐다고 한다. 화가 난 김정일은 장성택을 강선제강소 작업반장으로 ‘혁명화’, 곧 강제노동을 보냈다. 2년여 뒤 장성택을 그곳에서 빼내온 것은 성혜림이었다. 집안 식사 자리에 일부러 데려와 인사도 시켰다. 김정일은 그제야 화를 풀었고, 장성택과 화해했다. 장성택은 이때 성혜림에 대한 은혜를 아들 김정남에게 갚는 것일 수 있다.
장성택은 이후에도 김정남의 유학과 국외 체류를 줄곧 보살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북한 전문가는 “김정일 생전에도 김정남이 북한에 전화를 걸어 접촉하는 것은 장성택이었다. 아버지 김정일과는 직접 통화를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정남은 지난해 5월 일시적으로 북한에 귀국했을 때도 장성택을 만났다. 당시 장성택은 김정남에게 북한에 대한 비판 발언을 삼가라고 충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남은 2010년 9월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후계자로 확정된 뒤,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대 세습에 반대한다”는 등 비판적 발언을 쏟아냈다.
김정남이 호화로운 국외 체류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경제적 배경에도 장성택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장성택 실각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기대하기 힘든 지원이다. 김정남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모양새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김정남에 대한 김정은의 견제 움직임이 격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2009년 4월엔 성혜림 일가의 옛 거처이자, 김정남이 귀국하면 머물곤 했다는 별장이 급습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달 뒤에는 중국 당국이 김정남 제거 계획을 미리 알고 북한 쪽에 자제를 요청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불안해진 김정남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로는 뭐가 남았을까? 설마, 망명?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21 기사 더 보러가기
[관련영상] [한겨레 캐스트#210] '장성택 숙청', 북한은 어디로 가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