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탱크 광장]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시대’에 박근혜 정부의 ‘선 북핵포기 뒤 대규모 경제지원’ 정책은 유지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새 금융기구 가입 여부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박근혜 정부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회원국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고민을 멈출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고민의 시발점은 2013년 3월 독일 드레스덴에서 밝힌 ‘선 북핵포기 뒤 대규모 경제지원’ 정책이다. 이 정책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 등장하면서, 그대로 유지하기도 어렵고 포기하기도 어려운 계륵과 같은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이 정책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면, 6자회담 당사국은 물론이고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금융기관들과 공동출자해 동북아개발은행을 만든 뒤 이를 통해 북한에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WB·ADB 중심 선핵포기 대북 지원
‘드레스덴 구상’ 유지 여부 고민 필요
유엔 방식으로도 경제통계 집계 등
북 국제기구 가입 준비 움직임 다양
AIIB 투자로 북 철도·도로 현대화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도움…활용을 그런데 남한이 이 정책을 유지한다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서 남한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남한이 이 은행에서 주도권을 강화하려면 북한 지역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그런 면에서 남한의 자기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의 북한 지역 투자를 강조할 명분과 동력을 스스로 없애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남한 정부가 정책을 바꾸면, 정책의 지속성과 안정성에 대한 비판들을 낳을 수 있다. 현재처럼 남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북한의 입장이 어떤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과 함께 남북이 모두 이익이 되는 ‘2인3각’ 경기를 펼칠 수가 없다. 전문가들은 그렇더라도 앞으로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국제사회 진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지난 3월31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이 2월 진리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임시사무국 사무국장에게 가입 의사를 타진했지만, 불가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금융제재와 북한 경제자료의 불충분성 등을 주된 이유로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한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가입 협상을 지켜본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 기사가 오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투자은행에 어떤 국가가 가입신청레터를 보내면 중국은 이를 전체 신청국이 회람할 수 있도록 해왔”는데 “중국이 북한의 신청레터를 회람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북한이 중국 쪽에 비공식적으로 가입 문의를 했을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 가능성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장형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설사 북한이 가입신청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가입 가능성은 ‘제로’”라고 주장한다. 장 교수는 “북한이 국제통화기금(IMF)에조차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의 가입을 승인하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북한도 이런 자신의 처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는 2013년 3월31일 경제·핵 병진정책을 발표하면서, “경제건설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비서는 또 올해 신년사에서도 “대외경제관계를 다각적으로 발전시킬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실제로 북한은 대외관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 재일 조선대학교의 박재훈 교수가 2013년 9월 평양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의 이기성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도 그 한 증거다. 박 교수는 이 인터뷰 내용을 ‘조선경제연구회’가 일본 도쿄에서 펴내는 계간 <조선경제자료> 2014년 1호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주체의 사회주의정치경제학의 법칙과 범주>(1992, 평양 사회과학출판사)를 집필하기도 한 북의 원로 경제학자인 이 교수는 인터뷰에서 “2011년도 국내(북한) 총생산액은 220억7000만달러, 1인당 소득은 904달러였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2007년도의 1인당 국내 총생산액은 638달러”였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교수가 “이것들은 유엔에서 사용하는 지표로 계산한 것”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이 교수는 이 지표가 “우리(북한)가 사용하고 있는 사회총생산액 계산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의 이런 설명은 북한이 이미 두가지 방식으로 통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전 사회주의 방식으로 통계를 집계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유엔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도 통계를 집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이렇게 두개의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국제기구 진출 등을 위해서는 유엔 방식의 통계를 작성하고 제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이밖에도 “자금세척 및 테로(테러)자금 지원 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기준’”도 지킬 것을 공약하는 등 국제적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월15일 <조선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중앙은행 김천균 총재가 ‘자금세척 방지에 관한 금융행동그루빠’(FATF·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 의장에게 북한이 ‘자금세척 및 테로자금 지원 방지를 위한 행동계획’을 이행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김 총재는 인터뷰에서 “조선이 이번에 리행을 공약한 행동계획에는 자금세척 및 테로자금 지원을 범죄시하고 처벌할 데 대한 법률적, 기구적 조치들과 관련한 리행 권고사항이 들어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여러 움직임들은 북한이 국제기구 가입을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국제사회 진출을 갈망하고 있는 북한의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 북한을 주요한 투자 지역으로 선정하도록 남한이 주도하거나 북한과 협조하는 정책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일부에서는 4월13일 중국 정부가 관영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을 통해 밝힌 ‘일대일로’(一帶一路) 노선에 한반도가 포함돼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활용론은 물건너간 것 아니냐는 비관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물류 문제를 연구해온 원동욱 동아대 국제학부 교수는 “아직 경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4월에 공표된 ‘일대일로’ 노선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형성돼가고 있는 과정 중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원 교수는 “최근 발표된 일대일로 노선도 2014년 이전에 나왔던 노선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표적 사례가 이번에 러시아를 경유하는 노선이 포함된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비단길에 러시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 교수는 “그렇지만 중국이 러시아와 주요한 쟁점들에 대해 합의를 봤기 때문에 일대일로 노선에 러시아도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사업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원하기 때문에 주변국과의 협상 결과를 일대일로 노선에 계속 반영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한반도 포함 여부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원 교수는 “중국은 이미 오는 8월에 단둥, 오는 10월에 훈춘까지 고속철을 개통시킨다”며 “현재 중국 내 고속철 생산이 과잉돼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반도로 고속철을 연결하는 사업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만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의 투자로 북한 내의 철도와 도로가 현대화한다면, 남북한은 경제발전을 위한 더없이 좋은 기회를 맞게 되는 셈이다. 이는 곧 국제적인 자금으로 박 대통령이 제안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완성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남북의 협력이다. 북한이 자국에 대한 투자를 간절히 원하는데 남한이 반대하거나, 남한이 한반도로의 투자 유치에 힘쓰는데 북한이 무관심하다면, 투자 자본 유치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남북한에는 경제협력을 논의할 아무런 기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북핵 포기 뒤 대규모 경제지원’ 정책은 남북한의 협력에 중대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그 문제는 기획재정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청와대와 외교부 등 모든 관계기관이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이 시점에서 핵심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박 대통령의 청와대가 ‘북핵 포기 뒤 대규모 경제지원’ 정책을 포기하거나 북핵 폐기와 경협을 병행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의 ‘일대일로’ 논의는 남북의 시간은 멈춰 있어도 세계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이라도 남북이 협력해 멈춰 있는 시간을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남북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함께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시간들이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유엔 방식으로도 경제통계 집계 등
북 국제기구 가입 준비 움직임 다양
AIIB 투자로 북 철도·도로 현대화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도움…활용을 그런데 남한이 이 정책을 유지한다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서 남한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남한이 이 은행에서 주도권을 강화하려면 북한 지역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그런 면에서 남한의 자기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의 북한 지역 투자를 강조할 명분과 동력을 스스로 없애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남한 정부가 정책을 바꾸면, 정책의 지속성과 안정성에 대한 비판들을 낳을 수 있다. 현재처럼 남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북한의 입장이 어떤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과 함께 남북이 모두 이익이 되는 ‘2인3각’ 경기를 펼칠 수가 없다. 전문가들은 그렇더라도 앞으로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국제사회 진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지난 3월31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이 2월 진리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임시사무국 사무국장에게 가입 의사를 타진했지만, 불가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금융제재와 북한 경제자료의 불충분성 등을 주된 이유로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한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가입 협상을 지켜본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 기사가 오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투자은행에 어떤 국가가 가입신청레터를 보내면 중국은 이를 전체 신청국이 회람할 수 있도록 해왔”는데 “중국이 북한의 신청레터를 회람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북한이 중국 쪽에 비공식적으로 가입 문의를 했을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 가능성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장형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설사 북한이 가입신청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가입 가능성은 ‘제로’”라고 주장한다. 장 교수는 “북한이 국제통화기금(IMF)에조차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의 가입을 승인하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북한도 이런 자신의 처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는 2013년 3월31일 경제·핵 병진정책을 발표하면서, “경제건설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비서는 또 올해 신년사에서도 “대외경제관계를 다각적으로 발전시킬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실제로 북한은 대외관계 발전을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 재일 조선대학교의 박재훈 교수가 2013년 9월 평양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의 이기성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도 그 한 증거다. 박 교수는 이 인터뷰 내용을 ‘조선경제연구회’가 일본 도쿄에서 펴내는 계간 <조선경제자료> 2014년 1호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주체의 사회주의정치경제학의 법칙과 범주>(1992, 평양 사회과학출판사)를 집필하기도 한 북의 원로 경제학자인 이 교수는 인터뷰에서 “2011년도 국내(북한) 총생산액은 220억7000만달러, 1인당 소득은 904달러였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2007년도의 1인당 국내 총생산액은 638달러”였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교수가 “이것들은 유엔에서 사용하는 지표로 계산한 것”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이 교수는 이 지표가 “우리(북한)가 사용하고 있는 사회총생산액 계산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의 이런 설명은 북한이 이미 두가지 방식으로 통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전 사회주의 방식으로 통계를 집계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유엔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도 통계를 집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이렇게 두개의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국제기구 진출 등을 위해서는 유엔 방식의 통계를 작성하고 제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이밖에도 “자금세척 및 테로(테러)자금 지원 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기준’”도 지킬 것을 공약하는 등 국제적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월15일 <조선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중앙은행 김천균 총재가 ‘자금세척 방지에 관한 금융행동그루빠’(FATF·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 의장에게 북한이 ‘자금세척 및 테로자금 지원 방지를 위한 행동계획’을 이행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김 총재는 인터뷰에서 “조선이 이번에 리행을 공약한 행동계획에는 자금세척 및 테로자금 지원을 범죄시하고 처벌할 데 대한 법률적, 기구적 조치들과 관련한 리행 권고사항이 들어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여러 움직임들은 북한이 국제기구 가입을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국제사회 진출을 갈망하고 있는 북한의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 북한을 주요한 투자 지역으로 선정하도록 남한이 주도하거나 북한과 협조하는 정책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연재싱크탱크 광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