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기지에 도착해 정경두 합참의장과 인사를 하고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이 주한미군 기지 건설에 돈을 얼마나 댔을까.
국내 언론 대부분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난 7일 평택 험프리스 기지 방문을 보도하면서, 기지를 소개할 때 거의 빼놓지 않은 말이 “해외 미군기지 중 세계 최대 규모”라는 말과 함께 “한국이 기지건설 비용(100억달러)의 92%를 부담했다”는 내용이었다. 8일 저녁 발표된 ‘한·미 공동언론발표문’에도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관련 공평한 비용 분담이 바람직함을 인식하면서, 대한민국이 주한미군 평택기지 확장에 90억불 이상을 기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험프리스 기지 건설에 한국과 미국이 대략 50대50으로 비용 부담을 했다”는 정부의 기존 설명과 다른 것이다.
어떤 게 맞을까. 언론 보도대로 한국의 비용부담이 전체 비용의 92%일까, 아니면 과거 정부의 설명 대로 대략 50% 수준일까.
‘한국의 92% 비용 부담’ 주장이 처음 나온 곳은 청와대였다. 남관표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3일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방한 관련 언론 브리핑을 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방문할 험프리스 기지에 대해 “전체 부지 및 건설비 100억달러 중 한국이 92%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이처럼 “한국이 험프리스 기지 건설 비용의 92%를 부담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부는 2000년대 초 이 사업을 시작한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줄곧 “한국과 미국이 대략 50대50 수준으로 분담한다”고 설명해 왔다. 그동안 국내 시민단체 등에서 “한국이 훨씬 더 많이 부담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됐고, 심지어 사업 당사자의 한축인 미국에서도 “한국이 비용의 90% 이상을 부담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정부는 “사실이 아니다”며 이를 부인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청와대의 ‘92% 비용부담’ 발표는 돌연한 입장 선회이며, 뒤늦게 시민단체 등의 문제 제기를 인정한 것이다.
본래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 방문한 험프리스 기지는 애초 2000년대 초반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된 주한미군 기지 이전 사업에 의해 건설된 미군 기지이다. 2003년 4월 당시 노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정상회담 합의 이후 본격화된 주한미군 기지 이전 사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용산기지이전 사업’(YRP)은 서울 용산의 미군기지를 험프리스로 옮기는 사업이고, ‘연합토지관리계획’(LPP)는 의정부·동두천 등 한강 이북에 산재한 주한 미 2사단을 험프리스로 옮기는 사업이다. 당시 용산기지 이전은 한국이, 한강 이북의 미 2사단 이전은 미국이 요구했다. 비용은 한·미간 합의된 ‘원인제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용산기지 이전은 한국이, 미 2사단 이전은 미국이 부담하기로 했다.
올해 말 마무리될 예정인 미군기지 이전 사업의 전체비용은 대략 16조원으로 추산된다. 국방부 주한미군기지건설사업단은 2015년 12월 언론 자료에서 한국이 부담해야 할 용산기지 이전사업의 사업비는 8.86조원, 미국이 부담해야 할 연합토지관리계획(미 2사단 이전)의 사업비는 7.1조원일 것으로 추정했다. 한·미가 대략 50대50 비율로 분담한다는 기존 정부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실제 비용부담이 정부의 공식 발표보다 훨씬 많다는 주장은 애초 미국 쪽에서 먼저 제기됐다. 2008년 3월 버웰 벨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미 의회에서 미국이 전액 부담해야 할 ‘미 2사단의 이전 비용’에 대해 “한·미가 50대50으로 분담한다. 50%는 미국이 부담하고 나머지 50%는 한국의 방위비분담금에서 부담할 것”이라고 증언했다. 당시 국방부는 “미 2사단 이전 비용은 미국이, 용산기지 이전 비용은 한국이 각각 분담한다는 ‘원인제공자 부담 원칙’에 변함이 없다”며 벨 사령관의 발언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앞서 2007년 3월엔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대사가 본국에 “한국의 부담 비율이 전체 비용의 93%로 추산된다”고 보고한 3급 비밀 전문이 2011년 7월 정보공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공개됐다. 또 2005년 3월엔 리언 라포트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 의회에 출석해 미군의 부담이 6%에 불과할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한국의 50% 부담’ 주장과 ‘90% 이상 부담’ 사이의 차이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때문이었다. 미국은 매년 한국이 주는 방위비분담금을 미2사단 이전 사업에 전용해 사용했다. 미국이 방위비분담금을 미군기지 이전사업에 전용하기 위해 곧바로 쓰지 않고 적립한 돈은 2008년 10월엔 1조1193억원에 이르는 등 엄청난 규모에 이르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국내 시민단체에선 “미군이 군사건설비로 써야할 돈을 적립해 놓고 이자놀이를 하고 있다”며 “당장 환수조치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미국은 이렇게 주한미군 이전 사업에 전용한 방위비분담금을 한국의 부담으로 계산한 반면, 한국 정부는 “방위비분담금으로 지원된 돈은 미국쪽 계좌에 입금되는 순간 미국 돈이 된다”는 논리로 이를 한국 쪽 부담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정부의 이런 태도는 ‘미군이 주한미군 이전 사업에 방위비분담금을 전용하고 결국 한국이 사업 비용의 90% 이상 부담한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국내 반발 여론이 거세질 것을 의식한 것이다. 한국의 부담이 많지 않다는 쪽으로 강조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경기도 평택 미군 험프리스 기지 전경. 평택/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청와대가 이번에 정부의 기존 입장을 뒤집고 ‘비용부담 92%’라는 수치를 선뜻 공개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분담금 증액 압력에 대한 방패막이 성격이 커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후보시절 부터 한국 등을 겨냥해 ‘안보 무임승차론’을 거론하며 방위비분담 증가를 강하게 압박해왔다. 이에 대해 정부는 “우리가 험프리 건설 비용의 92%를 부담할 정도로 주한미군 주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안보에 무임승차하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이번에 험프리스 기지를 방문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이번에 공개된 92%라는 수치에는 미군이 전용한 우리 방위비분담금도 포함한 수치인 것으로 안다. 국익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정부의 기존 입장을 번복한 것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이 국민을 상대로 설명할 때 다르고 외국을 상대할 때 다르다면, 행정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정책 집행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정부가 국익만 앞세워 충분한 해명도 없이 기존 입장을 슬그머니 뒤집는 것은 장기적으로 정부 정책의 신뢰 기반을 스스로 훼손하는 길이라는 지적이 많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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