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대통령은 곧바로 “다수당의 부당한 횡포”라며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다음날, 야당 대표는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하는 중대한 문제”라며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은 대통령이 져야 한다”고 압박 수위를 높였다. 야당의 원내사령탑도 격분했다. 그는 “(대통령의 거부는) 참으로 못난 이의 오기”라며 “이제 대통령과 직접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선전포고했다. 해임건의안 대상이었던 장관에게는 “이미 해임된 것이다. 국회 상임위원회는 물론 국회 어느 기관에도 와서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를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13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이처럼 여야가 날선 공방을 주고받은 건 언제일까? 지난달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 이후 벌어진 것일까? 아니다. 13년 전인 2003년 9월의 일이다. 당시엔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이 대상이었고, 다수 야당을 이끌며 대통령을 비판한 이는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홍사덕 원내총무였다. 당시 다수당의 횡포에 역정을 냈던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해임건의안 통과 14일 만에 김 장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국경색이 더 심화한 것은 물론이고, 김 장관은 ‘국회에 발도 붙이지 못하는’ 식물장관으로 역사에 기록됐을 것이다.
13년 뒤 김재수 장관은 어떨까? 2주를 버텼던 김두관 전 장관처럼, 김 장관은 지난주까지 야당의 집중포화에도 꼬박 2주일을 버티는 탄탄한 맷집을 보여줬다. 2주 사이 벌어진 상황도 공교롭게 13년 전과 비슷하다.
우선, 태풍이 왔다. 2003년엔 ‘매미’, 2016년엔 ‘차바’다. 한 명은 재난관리를 책임지는 행자부 장관으로, 또 한 명은 농업 피해를 책임지는 농식품부 수장으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특히 김재수 장관은 차바가 한반도 남쪽을 쓸고 간 뒤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거의 매일 피해 현장을 방문하고 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그의 페이스북엔 날마다 현장방문 활약상이 사진 3~4장과 함께 같은 포맷으로 올라온다.) 지난 5일과 10일엔 국회에서 새누리당 주최로 열린 태풍 피해 당정협의에도 참석해 적극적인 의견을 냈다. (기자들의 카메라를 향해서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정치적으론 해임 됐어도, 당장 눈앞에 벌어진 민생 현안을 급박하게 챙겨야 하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는 듯 보인다.
자신을 해임 대상으로 삼은 야당의 공세에 맞서 불만을 드러낸 내용에도 공통점이 있다. “비명문대, 이장·군수 출신이 아니었다면 한나라당이 그랬겠느냐”라는 김두관 장관의 말과 “시골 출신에 지방대 나온 흙수저라 무시당했다”는 김재수 장관의 항변은 꽤 닮았다. 거대 야당이 정국 주도권을 위해 이른바 ‘약한 고리’를 노렸다는 의심이다.
김재수, 해임건의안 통과 뒤 20차례 현장 ‘과잉’ 방문
하지만 닮은꼴은 여기까지였다.
2003년의 김 장관은 “부당하지만 국회 의결을 거스를 수 없고, 장관직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 사표를 냈다. 화를 추스른 노무현 대통령도 다수당을 무시하고는 제대로 국정을 수행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2016년의 김 장관과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까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거대 야당의 협조 따윈 필요 없다는 태도다. 소수 여당이 식물장관의 든든한 ‘온실’이 돼줄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정상적인 장관직 수행을 못하면 피해가 고스란히 ‘농정’과 ‘농민’에게 돌아가는데도, 이런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닌 듯하다.
실제 김재수 장관을 대하는 야당의 분위기 등을 보면, 이는 괜한 걱정이 아니다.
김 장관은 취임한 뒤 한 달 동안 20차례 현장방문을 했고 그때마다 출입기자들에게 문자, 메일, 사진 등을 보내 자신의 동정을 계속 알릴 만큼 업무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농림부 안팎에서 해임건의안 통과 뒤 전임 장관이나 다른 부처 장관에 비해 ‘과잉 행보’를 하고 있다고 우려할 정도다.
농림축산식품부 이준원 차관(왼쪽)이 26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의 농림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들 질의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재수 장관. 이날 야당 의원들은 김재수 장관 대신 이준원 차관에게 질의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국회 분위기는 싸늘하다. 국정감사만 해도 그렇다. 장관은 답변에 나서지 못했고, 농림축산식품부는 장관을 둘러싼 의혹을 해명하는 자료를 내기에 바빴다. 김 장관은 지난달 26일 첫 국정감사 때부터 “국회가 장관의 불신임을 의결했는데 증인으로 참석해 대단히 유감스럽다. 자격 없는 장관의 결단을 촉구한다”(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국감에 참석한 야당 의원들은 질문을 장관이 아닌 차관에게 했다. 하지만 답변에 나선 이준원 차관은 “정책 결정이라 장관과 협의할 것”이라거나 “장관과 의논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주요 답변을 피해갔다.
야당 의원들은 차관에게 질의…김재수는 투명인간
김 장관을 둘러싼 의혹은 국감장에서도 계속 이어지며 다른 농정 이슈들을 삼켰다. 농수산물유통공사(aT) 사장 재직 시절 회사 돈으로 김 장관이 다니던 교회에 기부를 한 사실이 논란이 됐고,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진행하던 케이(K)-밀 사업에 미르재단이 갑작스레 참여하게 된 배경과 김 장관의 연관성에 대한 추궁도 이어졌다. 공사 사장 시절 권익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장관급 출장 여비를 받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또 김 장관이 자신의 정책보좌관 후보로 지목한 농수산물유통공사 심아무개 홍보실장이 국감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김 장관에 대한 야당의 인격살인’이란 취지의 글을 올려 야당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김 장관이 심 실장을 자신의 정책보좌관으로 채용하려고, 그가 농림부 파견이 끝난 뒤 복직할 수 있도록 공사의 인사규정까지 바꿨다”(김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비판도 나왔다.
야당도 곤혹스럽다. 대통령의 일방통행을 견제하기 위해 꺼내 든 칼을 도로 집어넣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 장관 사퇴를 관철시키지 않으면, 민심이 여소야대를 만들어줬는데도 야당은 여전히 박 대통령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낙인이 찍힐 처지에 몰렸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지도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해임안 수용을 촉구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상임위 차원에서는 (김 장관의 존재를) 계속 무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과 법안 등을 논의하는 상대로 김 장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장관이 (정치적으로) 해임된 상태라 국감이 끝나도 차관과 논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런 (비정상) 상태가 임기 말까지 갈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농식품부 관계자 역시 “예산안이나 법 개정 문제는 야당의 협조가 필요하다. 쟁점이 거의 무르익거나 암초가 생기면 장관이 나서야 하는데 이게 작동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정무직인 장관의 핵심 업무가 예산과 법안 등의 협조를 구하는 대국회 업무라는 점을 고려하면, 김 장관이 100%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농해수위 소속으로 애초 해임건의안 상정을 반대했던 국민의당 황주홍 의원은 조금 다른 전망을 했다. 그는 “해임안을 통과시킨 야당으로선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면서도 “나중에라도 장관과 ‘사적으로’ 예산 등을 논의하는 것은 매너 위반”이라고 덧붙였다. 농촌 지역구 의원들이 농식품부를 상대로 지역구 사업 등을 챙겨야 하는데, 김 장관을 마냥 외면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뉘앙스다. 그는 해임건의안 상정과 관련해서도 “왜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짧은 정치를 하느냐는 게 (당시) 내 항변이었다”며, 야당이 해임건의안을 관철할 만한 뾰족한 전략이 없는 상황을 꼬집기도 했다. 실제 야권 내부에선 해임건의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박 대통령의 문제이지, 김 장관을 계속해서 투명인간 취급하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있다.
그렇다면 김 장관은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보호막 아래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 대통령은 김 장관을 끌어안고 얼마나 버틸까? ‘해임건의안 통과’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임무를 수행하는 장관은 대한민국에 여태껏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을 만큼 희귀한 사례여서 비교 대상도 없다.
“상식을 뛰어넘는 박 대통령“ 김재수 장관 ‘장수’ 예측 나와
정치권에선 박 대통령이 어떤 형태로든 해임건의안을 수용하고, 김 장관은 곧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란 일부의 전망이 있긴 하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한 인사는 “박근혜 대통령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지금껏 박 대통령은 정치적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지 않으냐”며 김 장관의 ‘장수’를 예측했다. 2003년의 노무현은 훗날 지지자들의 욕을 먹어가며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할 만큼 상대를 의식했지만, 2016년의 박근혜는 야당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단 한 번의 양보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애초 야당이 김재수 장관에 대해 해임건의안을 제출·상정·통과시킨 것은 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경고의 의미가 농후했다. 김 장관의 탄핵이 아닌 해임건의안을 택한 것 자체가 대통령의 국정 오류나 인사 실패를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김재수 장관을 일종의 피해자로 보는 시각은 이런 관점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실제 김 장관은 박 대통령의 ‘불통’에서 파생된 ‘희생양’이 맞다. 이는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2003년 김두관 장관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유가 각각 ‘친북 인사의 이적행위 방조’, ‘한총련 시위 대처 실패’ 등 장관과 직접 관련성이 떨어진다는 점만 봐도 이런 정치적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 집권 5년 동안 15번의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만큼 대통령 견제에 공을 들였다. 이 중에는 2001년 4월 제출된 이근식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처럼 장관 임명 전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 시절 벌어진 일을 문제 삼아 취임 한 달 만에 제출된 것들도 있다. 1999년 10월 제출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현 국민의당 원내대표) 해임건의안 역시 장관 재임 시절 일이 아닌 직전 청와대 공보수석 때의 일을 문제 삼아 제출됐다. ‘임명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장관에게 직무능력과 무관하게 해임을 건의했다’는 박 대통령의 거부 사유가 옹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대통령이 버리지 못하는 ‘관상용 식물’
그러니 김재수 장관의 거취는 이미 개인의 자질 문제를 떠나, 헌법상 보장된 의회의 행정부 견제 권한을 대통령이 인정할지 말지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박 대통령이 여소야대로 확인된 총선 민의를 수용해 남은 임기 동안 야당과 협치를 할 것이냐 아니면 또다시 고립의 길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바탕 김재수 장관 해임건의안 파동을 겪은 뒤 현재 정치권의 시선은 온통 미르·케이(K)스포츠재단과 최순실·차은택씨 관련 의혹에 쏠려 있다. 의회의 뜻을 무시하는 박 대통령의 일방통행과 김 장관의 거취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하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논란이나 백남기 농민 사망 등에 대한 태도에서 보듯 청와대가 이번에도 ‘악재’를 또 다른 ‘악재’로 덮으며 버티는 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야당의 협조를 기대하기 힘든데, 여당은 허약하다. 대통령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사안이 너무 많아 언제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지 몰라 불안하다. 지지자들마저 점점 멀어지는데 청와대만 그걸 모르는 것 같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가 한탄하며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김재수 장관도 아마 사의를 표명했을 것이다. 절대 안 된다는 게 대통령의 뜻인데, 김 장관 개인에겐 매우 가혹한 주문”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식물장관으로 사는 게 그 자신도 마냥 좋지만은 않을 거란 이야기다.
박 대통령이 버티면서, 김 장관은 끝없이 이어지는 ‘일방통행 국정운영’ 사례 가운데 맨 윗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야 할 처지가 됐다. ‘헌정사상 초유’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와 함께.
석진환 송경화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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