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충남 천안시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2022 국회의원 연찬회 만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법원이 국민의힘의 비상대책위원회 전환 결정을 무효로 판단한 핵심 이유는 비대위로 전환할 만한 ‘비상상황’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이준석 전 대표와 당권을 두고 갈등을 빚던 권성동 원내대표 등 ‘윤핵관’ 쪽 일부 최고위원이 당 지도부 교체를 목적으로 “비상상황을 만들었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당헌은 물론 정당의 민주적 운영을 규정한 헌법·정당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재판장 황정수)는 26일 오전 이 전 대표 쪽 손을 들어주며 A4 16장 분량의 가처분 인용 결정문을 썼다. 법원 자체 판단 부분은 절반인 8장 분량이다. 재판부는 국민의힘 당헌에 따라 ‘비상상황’이 발생해야만 비대위를 설치할 수 있는데,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국민의힘은 비대위로 전환해야 할 만큼 비상상황에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비상상황 발생으로 보기 위해서는 ‘당 대표 궐위 또는 최고위원회의 기능 상실에 준하는 경우’가 발생해야 한다. 그러나 권성동 원내대표가 직무대행으로 당 대표 직무를 수행하는 등 당 의사결정에 지장이 없었으므로 ‘궐위에 준하는 상황’이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최고위 기능 상실에 대해서도 “사퇴서를 제출해야 비로소 사퇴 효력이 발생한다는 국민의힘 주장에 의할 때 비상상황을 선언했던 상임전국위 의결 당시까지 정원의 과반인 5명이 남아있어 최고위 기능을 상실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앞서 국민의힘은 “배현진·윤영석 최고위원이 정치적으로 사퇴 선언을 했을 뿐 공식적으로 사퇴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임전국위·전국위 소집 요구를 의결한 최고위 결정은 유효하다”고 했는데 자충수가 된 셈이다.
법원이 국민의힘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의 직무 집행을 본안판결 확정 때까지 정지해야 한다며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국민의힘을 상대로 제기한 당 비상대책위원회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한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실 앞이 취재진들로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재판부는 사법부가 집권여당 비대위를 정지시키는 초유의 상황에 대해 ‘정당민주주의 원칙’을 들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정당의 자율성 원칙에 따라 정당 내부 의사결정은 최대한 존중돼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당원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정당민주주의 원칙과 민주적 내부질서를 해하는 경우까지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법원 판단은 정당 운영의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하면서도 정당 민주주의 원칙 등이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판단할 경우 적극 개입해 온 사법부 기존 입장이 반영된 결정으로 보이지만, 한켠에선 권력싸움을 생리로 하는 정당 내부 문제에 법원이 지나치게 개입한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민의힘이 무리하게 (비대위 전환을) 강행한 측면이 있지만, 당내 분쟁을 당에서 해결 못하고 법원에 맡기고, 법원 역시 직접적 판단을 내린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헌 위반이라 가처분을 인용하는 구조는 납득 가능하다. 다만 결론에서 굉장히 모호한 당내 민주주의를 법원이 하나하나 따지고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법원이 정당 민주주의에 자기 잣대를 너무 강하게 제시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이날 오후 가처분 결정에 반발하며 법원에 이의신청을 했다. 이와 별개로 이 전 대표가 청구한 본안 소송도 서울남부지법 민사12부에 배당된 상태다. 다만 본안 판단에 준하는 수준의 가처분 인용 결정이어서, 본안에서도 이를 뒤집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는 전망도 있다. 서울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가처분 결정은 사실상 본안 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웬만큼 자기 확신이 없으면 이번처럼 인용 결정을 쓰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 본안에서 당헌 해석 등에 대한 정당 내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해 ‘일부 하자가 있으나 무효라고 볼 수 없다’는 결정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날 법원 판단은 예상보다 일찍 나왔다. 앞서 법원은 “신중한 검토”를 이유로 9월 초 결정 가능성을 예고한 바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했던 1박2일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서 차기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 개최 시기를 논의했는데, 재판부 입장에선 가처분 결정 전에 전당대회 일정이 결정되는 것을 피하려 했을 수 있다.
고병찬 장예지 손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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