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오른쪽), 천영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19일 서울 청계천로 전태일기념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두 진보 원로는 “이런 자리를 정말 피하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민주노동당의 경험을 근거로 철 지난 꼰대 짓을 하는 게 아닌지, 그렇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권영길·천영세 두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어렵사리 자리에 앉았다. 정의당의 한계와 활로에 대해 2시간 가까이, 걱정스럽게 발언을 이어갔다. 방담은 19일 오후 서울 청계천로 전태일기념관 6층 세미나실에서 진행했다.
―정의당 10년 평가위원회가 ‘정의당 10년은 거의 망가졌다’고 평가하는 것 같아요. 왜 이렇게 폭망했다고 보세요?
“정의당 안에서도 존립의 위기라고 말하잖아요. 단지 지난 3월 대선과 6월 지방선거의 결과만 놓고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의당 창당 이후 지난 10년 동안 진보정당으로서의 위상, 정치 노선, 조직 노선, 이런 부분에서 정말 진보정당으로서 손색이 없는 역할을 해왔느냐? 그렇지 않았죠. 핵심은 정의당의 주체는 누구냐, 누구를 위한 정당이냐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여러 한계와 문제를 안고 있었죠.”(천영세)
―구체적으로 뭘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진보정당이 뭡니까? 진보정당은 첫째,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 되었어야 하는데 정의당은 그런 모습을 갖추지 못했어요. 정의당도 노동자를 위해서 일한다고 이야기는 해왔지만 실질적인 행보를 보면 그러지 못했어요.”(권영길)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은 뭐냐? 누가 그 정당을 하고, 누구를 위한 것이냐? 그 부분은 역시 민주노동당 창당 때 우리가 일컫던 주체, 기반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민중입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런 사회적인 약자 부분을 포괄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진보정당의 주체는 그들이고 진보정당의 모든 사업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고 봐요.”(천영세)
―정의당도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말합니다.
“용어는 바뀌었지만 한마디로 다 노동자 아닙니까. 노회찬 의원이 얘기한 6411번 버스의 투명인간들도 다 그거란 말이에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정의당이 그 부분을 확고하게 주체로 세우고, 작은 사업이든 큰 사업이든, 당의 목표가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되는데 여러 사람들이 인정하듯 지금까지 정의당은 그렇지 못했어요. 청년, 여성, 물론 그들이 대부분 노동자일 수 있지만 그 부분이 너무 부각되고 그들 중심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비쳐 있는 것은 어쨌거나 정의당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천영세)
“진보정당의 생명은 포괄적·총체적인 평등 추구 아닙니까. 그럼 여성 차별적 문제, 이건 당연히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이 여성할당제를 처음 주장했어요.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죠. 여성이 없는데 누가,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고까지 말했어요. 그러나 제도가 있으면 사람이 만들어진다며 그걸 밀어붙였어요. 진보정당이라고 다 동의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토론 끝에 여성할당제를 강제적으로, 비례만이 아니라 지역에도 적용했어요. 국회에 들어와서도 이 문제를 당의 중점 간판 사업으로 내걸었어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에 중점을 둔 가운데 여성의 문제를 이렇게 제도로 접근했거든요. 정의당은 왜 페미정당 논란에 휩싸였을까요? 이런 부분에 관해 정의당의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권영길)
―여성, 약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를 한 것인데, 정의당에선 억울할 것 같은데요?
“그게 더 문제라는 거예요. 지향하지는 않는데, 몇몇이 그렇게 하는 게 정의당의 전체처럼 비치는 게.”(권영길)
“상대적인 거예요. 예를 들면 최근 정의당 비대위가 구성되면서 전에 없이 거제 (조선소) 노동 현장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의당이 평상시에 좀 더 그렇게, 적극적으로 노동을 중심 사업으로 깔고 그러면서 페미든, 그 어떤 운동을 병행했으면 정의당이 이렇게 페미니즘 정당 논란에 휩싸이고, 그쪽으로 치우쳤다고 비판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노동 현장에서 멀어지고, 원내든 원외든 민중들의 삶,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현장에서 정의당의 깃발을 볼 수가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프레임이 씌워진 것이든 어쨌든 그런 논란이 생겨난 거란 말이에요.”(천영세)
“페미당 소리를 들어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의당을 만들었어야 하는데, 너무 좁은 의미의 ‘미투’에만 머문 게 아니냐는 것이죠. 정의당이 여성의 차별에 대해서 강령이라든지 정책이라든지 실천의 문제에서 그런 당을 만들고 실현하려 해왔나요? 특히 여성의 차별에서 제일 중요한 게 남성·여성의 노동 문제 아닙니까? 가장 저임금에 고통받는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수없이 문제가 됐는데, 정의당이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하고 해결하려 해왔느냐는 거예요. 그런 걸 안 하는 상태에서 돌출적인 몇몇 사건, 그런 걸 가지고 그냥 페미당이라 불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권영길)
―좀 과한 비판 아닌가요?
“이런 거예요, 이번 3월9일 치른 대선, 5년 전 대선에도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어요. 그럼에도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 대다수는 왜 ‘정의당이 내 당이다. 우리 당이다’라고 인정을 안 하는가?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은 부유세 신설해라, 무상교육 해라, 또 상가임대차보호법,
이자제한법 같은 부분을 평상시에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한나라당과 조중동 보수 언론은 ‘야! 민노당, 저 날강도 같은 것들’이라고 비난하고 공격했어요. 하지만 선거 때든 평상시든 이런 주장과 노력을 펼치니 ‘아, 저게 진짜 진보정당이구나’ 이렇게 된 거란 말이에요. 슬로건, 캐치프레이즈로 내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최근 정의당 비대위가 노동 현장, 투쟁의 현장에 나오니까 ‘그래, 얼마나 가나 보자’라는 비아냥도 나오잖아요. 이게 지금까지 노동 쪽에서 정의당이 취해온 어떤 것에 대한 불신 아니겠어요?”(천영세)
―비아냥이 있어도 지속해 가야 하는 방향 아닌가요?
“그게 맞는 방향이죠. 정의당이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하는 거죠. 자기 위상을 진보정당으로 설정했다면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했어야 되는 거죠.”(천영세)
―정의당은 진보정당을 자임했고, 노회찬, 심상정, 이정미 등이 그 책임을 지고 당을 이끌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민주노동당 시절 했던 것을 지금 정의당은 못 하는 상황이 온 것이죠?
“정의당이 문제지요. 당연히 해야 하는데, 안 한 문제라고요. 누가, 왜 안 했는지? 그게 당의 정책 집행 문제였는지, 아니면 그 이전에 강령적 문제인지, 이런 것을 현재 정의당 비대위가 성찰하고 짚어야 할 문제입니다. 정의당이 더불어민주당 2중대라는 얘기를 듣는 게 문제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정의당 스스로 물어야 된다고요. 민주당이 진보정당이냐, 아니냐? 민주당과 정의당이 말하는 진보의 차이를 정의당이 스스로 말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당은 그걸 안 하고, 못 하고 있는 겁니다. 당장 정의당의 강령 문제도, 반대가 있겠지만 토론해야 합니다. 정의당 강령에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박든지, 최소한 민주노동당의 경우처럼 ‘자본주의 질곡을 넘어서고 사회주의를 지향하고’라고 하든지, 뭔가 해야 합니다. 정의당도 민주당도 차별금지법 한다 하는데 그런 걸 가지고 어떻게 민주당과 정의당이 차별되겠냐 이겁니다.”(권영길)
“국민의힘은 극우정당이고, 민주당은 보수적 리버럴 정당인데, 지금 정의당이든 진보당이든, 진보정당은 이 부분을 명확히 달리하고 있다는 것으로 진보적인 걸 갖고 있고, 보여주고, 주장해야죠. 민주당 2중대라는 용어, 프레임 때문에 정의당이 쭈뼛쭈뼛하고 민감해할 일이 없어요. 문제는 누가 뭐라 하든, 정의당의 자기 정체성과 이념을 분명히 하면서 내걸 수 있는 정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 뿌리가 확실하면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데, 정의당은 그 뿌리가 약하니까 문제인 것이죠. 사회운동, 민중운동, 거기서 가장 중심 되는 것이 이 땅의 노동운동, 그 가운데서도 그 주체가 가장 확고하고 강한 세력이 민주노총 아닙니까? 옛날 민주노동당처럼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민주노총이 지금 조합원이 100만명인데 정의당이 같이 가야지요.”(천영세)
―민주노총이 기득권화돼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지금 민주노총의 주류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기업, 소위 고임금 노동자로 돼 있는 거 아니냐며, 정의당은 그들보다 더 어렵고 소외돼 있는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들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고 말해요. 맞는 말이에요. 수많은 노동대중을 다 당원으로 포괄하고, 진보정당 후원자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게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현재 조직돼 있는, 대기업 고임금 노동자들이 여전히 중심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소외된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의 중심을 이루고 있단 말이에요.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때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우리 정당을 한번 만들어보고자 시도했던 경험이 있는 주체예요. 그러니까 정의당이 밀착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천영세)
―정의당이 지금 민주노총을 포기하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포기되었다기보다 관계가 옛날처럼 밀착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의당과 민주노총이 서로 인정하는 바란 말이에요. 대선 때든 총선 때든 권(영길) 대표님하고 나하고 정의당, 진보당 어느 당 할 것 없이 진보정당 후보를 지원하러 창원과 울산, 이른바 진보 1번지인 영남 벨트에 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게 “하나가 돼서 오세요, 진보정당 후보를 하나만 내달라. 두개, 세개 진보정당이 후보가 갈라져 있고 당이 갈라져 있는데 우리들더러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고 해요. 그런데 지금
통합진보당이 분당되고 10년인데 진보대통합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민중정치, 노동정치를 복원해달라는 거예요.”(천영세)
―진보대통합을 어떻게 할 수 있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정의당을 포함해서 다른 진보정당도 당면한 과제가 뭔가요? 2024년 총선 대책입니다. 진보정당이 국회에서 정책 입안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의석을 가지고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노동자, 민중은 ‘너희끼리는 갈라져 있는데 우리는 그 차이점을 구분 못 하겠다.’ 이걸 제일 문제 삼고 있어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데 활발하게 토론이 안 일어나요. 분열된 상태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 적어도 다음 총선, 2024년에 이대로 가면 정의당 후보, 진보당 후보, 또 이 뭐 저기 노동당 후보, 또 녹색당 후보, 이렇게까지 출마할 수 있는데, 내가 볼 때 정의당이 착각하고 있어요. 원내 정당으로, 진보정당 중에서 일정 지지가 나오고, 선거 때 가면 아무리 못해도 현재와 같은 수준은 유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말은 안 하지만 정의당 머릿속에 들어 있어요.”(권영길)
“정말 이 해묵은 갈등, 분열, 분당 세력들 간에 갈등과 반목이 있지만 그
부분을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공멸이에요. 지금 정의당 사람으로 (다음 총선에) 명맥은 유지할지 모르지만, 그건 연명이지요. 진보당도 정의당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지방 의석) 몇석 좀 얻었다고 도토리 키재기로, 뒷골목 대장 노릇 하다 끝내려면 모르겠는데 그것에 자족한다면 큰일 납니다. 더 큰 보수 거대 정당이 앞에 있는데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바득바득, 어떻게 정의당 한번 이겨서 뭐 이걸 극복해보자는 건 한계에 부딪힐 거예요.”(천영세)
“지금처럼 이렇게 가면 지역구·비례 누구도 지지를 못 받아요. 다 참혹한 상황이 닥쳐요. 지금 정의당의 위기는 대선·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촉발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2024년 총선에선 진보정당 전체가 소멸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고 있어요. 진보정당의 중심, 당원이 되어야 할 노동자와 농민, 민중 속에서 이제는 완전히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리고, 사이비 유사 진보정당으로 옮겨간다는 거예요. 보수 양당 체제가 더 공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권영길)
“어렵지 않으면 진보정당이 아닙니다. 꽃길만 가겠다? 그러면 보수정당, 적당히 하면 되는 거예요. 지금 진보정당이 분열되고 분당된 와중에 거대 보수정당이 야금야금 그 기반을 잠식하고 있는데, 진보정당이 존재할 저수지의 물이 말라버리면 통합 문제, 후보 단일화는 몇년 지나면, 그때는 이미 늦어요. 정의당뿐만 아니라 진보당도 진보정당의 지도부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총체적인 이 위기 속에서의 역사적인 책무를 다해주기를 바라는 거죠.”(천영세)
권영길
-서울신문 기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
-민주노동당 대표/대선 후보
-제17·18대 국회의원
-20대 총선 정의당 선대위 고문
천영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공동의장
-민주노동당 사무총장/당대표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제20·21대 정의당 총선 선대위 고문
-민주노총 지도위원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