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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흔쾌히 합의” 숭늉부터 마셨던 외교, 남은 것은 ‘굴욕 외교’ 뿐

등록 2022-09-26 05:00수정 2022-09-26 17:06

윤 대통령 3개국 순방 결산
윤석열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캐나다 오타와 국제공항 공군1호기에서 귀국에 앞서 참모들과 안보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캐나다 오타와 국제공항 공군1호기에서 귀국에 앞서 참모들과 안보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5박7일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끝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밤 공군 1호기 편으로 귀국했다. 순방외교를 마친 대통령은 통상 귀국길에 기내에서 동행 취재진과 만나 순방 기간 이룬 성과를 설명하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방문 때와 달리 이번에는 귀국길 기내 간담회를 하지 않았다. 이번 순방외교에 관한 대통령실 내부 분위기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빈손 굴욕외교’와 욕설 파문으로 얼룩진 이번 순방을 계기로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를 새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첫 순방지인 영국에서부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참배 없는 조문’으로 입길에 올랐다. 대통령실은 “교통 체증”에 따른 영국 쪽의 안내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현지 사정을 미리 고려해 대비하지 못한 사전 조율 미숙이라는 국내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다.

대통령실이 순방 출발 전부터 예고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은 아예 불발되고, 뉴욕 행사장에서 ‘48초 대화’로 대체됐다. 대통령실은 사전 브리핑에서 한국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차별이 담긴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해법을 논의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부풀렸지만, 결과적으로 가시적인 해법은 나오지 않았다.

일본과는 만남의 성격조차 모호한 ‘한-일 약식 정상회담’으로 저자세 외교 논란을 자초했다. 윤 대통령은 뉴욕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있는 건물까지 찾아가 30분 동안 만나는 데 그쳤다. 최대 현안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에 관한 해법은 물론 나오지 않았고, 일본 쪽은 ‘비공식 간담’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뉴욕을 떠나기 직전 불거진 윤 대통령의 욕설 파문은 국민들에게 이번 순방의 전체적 인상을 규정하는 사건이 됐다. 외신에 보도되고 미 의원들이 윤 대통령에게 반박하는 트위트를 날리는 등 외교적 파장도 커졌다. 최초 논란 뒤 15시간 만에 내놓은 ‘윤 대통령의 욕설 대상은 미 의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라는 취지의 대통령실 해명은 되레 ‘거짓말’ 논란과 함께 ‘한국 야당은 욕해도 된다는 거냐’는 반발을 자초했다. 욕설 파문은 외교정책 내용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논란의 발단과 이후 해명은 외교·안보에 대한 대통령의 몰이해와 참모진의 무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윤 대통령의 이번 순방을 둘러싼 ‘외교 참사’ 논란은 표면적으로는 외교의 내용과 형식 등에 관한 사전 조율 부족과 현장의 돌발적 장면들에서 비롯됐다. 특히 ‘실세 참모’로 꼽히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지난 15일 윤 대통령의 순방 계획을 사전에 설명하며 “한-미,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성급히 발표한 것은 주요 실책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일본 쪽이) 흔쾌히 합의했다”고 발표한 것을 두고 일본 쪽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대화의 주도권을 일본에 내주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중 갈등 심화 속에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기술까지 미국과 동맹화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기조에서 비롯된 사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굴욕적 저자세 외교’란 평가가 나올 정도로 한-일 정상 만남에 집착한 것도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조하는 미국의 환심을 사려 과속한 것이란 평가다. 윤 대통령은 취임 뒤 한-미 동맹 강화를 외쳐왔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 사태에서 보듯,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바이든 정부 또한 미 정치권의 초당적 기조인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이혜정 중앙대 교수(정치국제)는 25일 “대중국 경쟁 심화 속에 미국은 힘이 떨어졌고, 과거와 달리 동맹과 이익을 공유할 여력이 없다”며 “한-미 동맹의 기본 셈법, 대미 외교전략의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인데도 오로지 미국만 바라보는 모양새”라고 짚었다.

이번과 같은 ‘외교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윤 대통령이 모든 나라가 각자도생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제 정세 속에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강화에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기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윤 대통령부터 거친 언사를 삼가는 등 치열한 국제 외교의 장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고, 정부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교체에도 나서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참모진이 윤 대통령에게 외교·안보 정책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라며 “이제라도 참모진을 쇄신하고, 대통령이 전문가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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