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범 ‘긴급조치 사람들’ 상임이사가 11일 서울 창덕궁길 ‘긴급조치 사람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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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30일 김명수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유종성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등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한 1, 2심 판결을 깨고 ‘긴급조치 9호 위반 수사 재판 피해자와 가족에 국가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유신정권이 행사한 대통령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라며 개인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2015년 3월 양승태 대법원의 판례를 7년5개월 만에 뒤집은 것이다.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을 때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한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해 영장 없이 국민을 체포 구금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과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봉쇄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1974년 발호된 1호, 2호(헌법 개정 논의 일체 금지), 75년 발호된 9호(유신헌법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금지)까지 긴급조치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유신헌법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한 고 장준하·백기완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첫 위반자로 실형을 살았다. 1975년부터 박정희 사망으로 유신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4년 동안 유지한 9호는 무려 1046명의 구속자를 만들어냈다. 막걸리에 취해 박정희를 욕했다고 영장 없이 잡혀가 구타·고문당한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 과정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까지 병합해 처벌받은 이들도 있었다. ‘막걸리 보안법’ 피해자들이다.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분석에 따르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이는 1140명, 관련 사건 수로는 585건에 이른다.
장준하 선생(맨 오른쪽)이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백기완 선생(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재판을 받고 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박정희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지 40여년이 지났지만 긴급조치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금도 법정에서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2010년 12월 긴급조치 1호 위반자인 오종상씨가 대법원에서 만장일치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긴급조치 위반자로 최초였다. 이후 피해자들의 재심 청구가 이어졌다. 2013년 3월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1호, 2호, 9호는 국민기본권을 침해하고, 주권 행사를 제한한 위헌이라고 결정한 뒤 재심 청구는 봇물이 터지듯 했다.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은 이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불법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해 정부가 민사적인 배상을 하라는 요구였다. 가장 많은 1046명의 구속자를 만들어낸 긴급조치 9호의 피해자들이 결성한 ‘사단법인 긴급조치 사람들’의 김명식 사무처장은 관련 사건번호 등을 일일이 분석한 결과를 근거로 “현재까지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긴급조치 피해 당사자는 모두 423명으로 대부분 1호와 9호 피해자”라며 “소송 자체를 포기한 경우가 많고, 사망자 등 유족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막걸리 긴급조치 관련자는 대부분 빠져 있는 숫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423명 가운데 최근까지 51명만 최종 승소했다. 대부분 수사기관의 고문, 가혹 행위 등이 재판에서 입증된 경우다. 194명은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가 확정됐다. 일부 판사들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전향적인 판결을 했지만 1, 2, 3심 판결이 엇갈렸다. 동일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제각각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암담한 영향을 끼진 것은 2015년 3월 양승태 대법원이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로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므로 국민 개개인에 대한 민사상 불법 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이었다. 이 판결 뒤 하급심에서 승소한 이들도 상급심에선 패소했다. 양승태 대법원은 2심 패소 뒤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에 대해선 심리 불속행 기각 방식으로 최종 패소를 무더기로 확정했다. 김명식 사무처장은 “패소자 관련 사건은 87건에 194명인데, 2015년에서 2016년 사이에만 61건이 심리 불속행 기각으로 패소가 확정됐다”며 양승태 대법원의 ‘고도의 정치 행위’ 판결에 따른 무더기 패소 결정을 비판했다.
고 백기완 선생 판결이 대표적 사례다. 양승태 대법원 판례 이전인 2014년 6월 1심 재판에서 승소한 백기완 선생은 대법원 판례 직후인 2015년 4월7일 열린 2심에서 패소했고, 그해 7월23일 대법원은 심리 불속행 기각으로 최종 패소를 확정했다. 2015년 9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부(부장판사 김기영·현 헌법재판소 재판관)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피해자 송상환씨 가족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위법이므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며 국가가 1억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양승태 대법원 판례에 정면으로 맞선 소신 판결을 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뒤집어 패소 판결을 했고, 대법원은 2016년 역시 심리 불속행 기각으로 송씨에 대한 최종 패소를 확정했다.
문재인 정부 때 사법 농단을 단죄하는 과정에서 2015년 대법원 판례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숙원인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사법 거래를 한 결과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긴급조치 피해자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에선 양승태 대법원장 사퇴를 요구하고, 사법부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시위도 이어갔다. 하지만 사법부가 자신의 잘못된 판례를 바로잡는 데까지 7년5개월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1963년 긴급조치에 관한 성명을 발표 중인 이후락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이 지난 8월30일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새로운 판례를 만들면서 현재까지 재판이 진행 중인 55건의 사건 피해자 178명의 판결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패소 확정판결을 받은 이들보다 소송을 늦게 시작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재판이 늦어진 이들, 또 양승태 대법원 판례 뒤 심상찮은 당시 법원의 분위기를 고려해 재판 연기를 신청한 이들이다.
실제 지난 13일 서울고법 민사21부(재판장 홍승면)는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해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옥살이한 고 장준하 선생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심 판결대로 국가는 유족에게 7억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5월 1심 법원인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재판장 김형석)가 “긴급조치 발령이 헌법과 법령에 위반하더라도 정치적 책임만 지고, 이에 따른 개별 수사·재판·형의 집행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정의의 관념에 반하고 부당하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지만 문재인 정부 법무부조차 1심 판결이 양승태 대법원 판례를 따르지 않았다며 항소했는데,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의 새 판례 이후 고 장준하 선생 유족의 경우처럼 현재 국가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 중인 이들의 재판에선 긍정적인 기류가 감지된다. 당장 10월에만 긴급조치 피해자 관련 재판이 25건이나 열린다. 특히 이달 말에는 고 박형규 목사, 고 윤한봉 선생, 천영초 선생 등 ‘거물급’ 인사들이 관련된 사건이 다뤄진다. 27일엔 대법원 선고가 6건이나 몰려 있어 지난 8월30일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새 판례가 실제 최종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김하범 긴급조치 사람들 상임이사는 “대법 판례 변경 이후 지금까지 장준하 선생 사건 등 2건이 승소했고, 나처럼 소송이 진행 중인 이들의 판결에도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패소자 구제와 실태 파악도 안 되는 막걸리 긴급조치 피해자 문제”라고 진단했다. 김 상임이사도 ‘77년 4월 한신대 유신 반대 시위’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체포됐고 학생시위로는 처음 반공법까지 적용돼 1년4개월 실형을 살았다. 손해배상을 청구해 1심에서 패소한 그는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김 상임이사의 진단처럼 긴급조치 피해자 문제 해결에 가장 큰 난제는 양승태 대법원 판례로 최종 패소 판결을 받은 194명을 어떻게 구제할 것이냐는 점이다. 이들은 이미 사법적 판단이 종결돼 김명수 대법원의 새로운 판례에도 현행법으로는 구제할 방법이 없다.
같은 긴급조치 1호 사건으로 구속됐지만 전혀 다른 판결을 받아든 고 장준하·백기완 선생의 경우가 확정 패소자 구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생생한 사례다. 재판이 늦게 시작된 장준하 선생의 경우 유족이 7억8천만원의 국가 배상을 받을 수 있지만 백기완 선생은 양승태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이미 확정 패소해 전혀 배상을 받을 수 없다.
김명수 대법원의 새 판례가 나온 뒤 약 한달 만인 지난 9월27일 국회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긴급조치 사람들, 박주민·김의겸·이탄희 의원실 공동주최로 ‘긴급조치 국가배상책임 판결과 피해자 권리회복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선 다른 이들보다 일찍 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한 사람들이 새 판례에도 더는 구제를 받지 못하고, 소송 진행 중에 판례가 변경된 사람들은 판례 변경의 혜택을 받는 건 형평에도 부합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12일 ‘유신 50년,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런데 구체적인 해법은 엇갈리고 있다. 긴급조치 사람들 등 피해자들은 국회가 판례 변경을 재심 사유로 인정하는 ‘재심특례법’을 제정해 최종 패소한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긴급조치 위반처럼 특정 사건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판례 변경을 재심 사유로 인정한다면 다른 경우에 판례 변경이 있더라도 이를 모두 재심 사유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김하범 상임이사는 “우리 피해자 단체는 이미 패소한 분들은 재심특별법을 만들어 다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된다는 입장인데 법조계 쪽에서는 민사 재심은 전례가 없고, 그렇게 되면 법적 안정성이 너무 흔들린다며 일괄 보상으로 가자는 의견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법적 안정성을 제일 먼저 흔든 게 사법부인데,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데 이제 와 안정성이 흔들린다고 얘기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법조계 일각에서 최종 패소한 이들에게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했다면 받았을 수 있는 배상금 정도의 액수를 일괄 지급하는 보상법을 만들면 피해자 구제와 법적 안정성 훼손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서도 “입법 과정에서 보상금 액수와 재정 부담 논쟁 등으로 사회적 논란이 번질 수 있다”며 타당한 해법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패소자가 본 피해의 핵심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받은 것이니 피해의 복구는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 핵심이지 일괄 보상을 통해 돈 몇푼 던져주는 게 아니라는 게 저희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막걸리 긴급조치 위반 피해자’ 실태 파악과 구제도 남은 중요한 과제다. “학생들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심리적 만족감이랄까 보람이라도 있었지만 이분들은 술 한번 먹고 말 잘못해서 삶이 파괴됐다. 후손까지 영향을 받고 인생이 송두리째 뒤틀렸을 가능성이 크다”며 “최소한 국가가 그 당사자나 후손들에게 당신들 잘못은 없다는 얘기를 해줘야 한다”고 김하범 상임이사는 말했다.
긴급조치 사람들이 실태 파악을 시도했지만 “정부 쪽에선 개인정보라 자료를 줄 수 없다는 답변만 왔다”고 한다. 김 상임이사는 “제일 바람직한 것은 대통령이 사과하고, 재판·수사 등 모든 자료를 가진 정부 기관이 실태를 파악해 공개하는 게 제일 좋은 해법인데 현재 (윤석열) 정부에선 그것을 기대하기가 좀 어려워 보인다”며 “결국 언론이나 피해자 단체들이 자발적 신고 센터를 운영해 막걸리 긴급조치 피해 접수를 받고 민변과 몇몇 법무법인이 이들에게 법률지원을 하는 공동기획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김 이사는 다시 한번 “국가가 나서서 해주는 게 제일 좋은데 현 정부 성격상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도 “지난번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에 대한 지연이자를 탕감하듯 정부가 좀 과감하게 이런 문제를 툴툴 털고 가면 괜찮을 텐데…”라고 말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에 대한 지연이자 면제 결정 때 “진영논리를 초월해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밝힌 만큼 통 큰 결단을 해달라는 것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