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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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본래 정치적 성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평생 검사로 일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스스로 “정무 감각은 꽝”이라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2019년 9월9일치 <한겨레> 3면에 제가 ‘검찰의 ‘정권 타고 넘기’ 신공에…검찰개혁 또 좌초하나’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쓴 일이 있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휘하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수사에는 검찰개혁을 저지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취지였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어떤 사람일까요? 검찰 안팎의 평가를 종합하면 ‘위험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검찰주의자입니다. 그가 가진 이데올로기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고 바로 검찰입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몇몇 언론에 “윤석열 검찰총장이 자신은 검찰주의자가 아니라 헌법주의자라고 말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하겠습니다.
“한편 윤석열 총장은 최근 대검 간부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일각에서 나를 검찰주의자로 평가하지만, 기본적으로 헌법주의자’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검찰개혁을 방해하기 위해 조 장관에 대한 수사를 한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한 반박이다.”
“윤 총장은 또 조 장관에 대한 수사가 정치적 수사라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선 ‘정치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다’며 ‘검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은 부패한 것과 같다. 중립성을 지키면서 본분에 맞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만 해도 윤석열 검찰총장은 정치적 색깔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문재인 정권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은 뒤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2020년 8월3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으로 ‘검·언 유착’ 의혹 수사에서 배제되었던 때였습니다.
“형사법에 담겨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정한 경쟁,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헌법 정신을 언제나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는 평등을 무시하고 자유만 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통해서 실현됩니다. 대의제와 다수결 원리에 따라 법이 제정되지만 일단 제정된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고 집행되어야 합니다.”
검찰총장이 이례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하며 정치적 발언을 한 것입니다. 한번 시작한 정치적 발언은 수위가 점점 올라갔습니다.
2021년 3월3일에는 대구고검·지검을 방문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부패완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월4일 검찰총장직을 사퇴하며 이런 메시지를 내놓았습니다.
“저는 오늘 총장을 사직하려 합니다.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이 사회가 어렵게 쌓아 올린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검찰에서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동안 저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분들, 그리고 제게 날 선 비판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법치, 정의, 상식, 자유민주주의 등 고도의 정치적 언어를 동원했습니다. 간결한 메시지의 강도와 울림이 웬만한 정치인 뺨치는 수준입니다.
정치인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메시지는 2021년 6월29일 대선 출마 선언에서도 반복됐습니다.
“이 정권은 권력 사유화에 그치지 않고 집권을 연장해 계속 국민을 약탈하려 합니다. 우리 헌법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 합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유는 정부 권력의 한계를 그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입니다.”
2022년 5월10일 대통령 취임사의 핵심도 자유였습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무려 35차례 사용했습니다. 통합이라는 단어는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스스로도 좀 민망했던지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어제 취임사에 통합 이야기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통합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 과정 자체가 국민통합의 과정이다. 통합을 어떤 가치를 지향하면서 할 것이냐를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이때는 국민통합이나 야당과의 협치에 대해서도 고민을 좀 했던 것 같습니다. 5월16일 국회 추가경정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진영이나 정파를 초월한 초당적 협력’,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의 전시 연립내각’,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의회주의’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랬던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7개월 만에 완전히 극우로 돌아섰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깨려는 세력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반복해서 선동함으로써 대중을 속아 넘어가게 하거나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폭력을 동원해 겁을 주려고 합니다. 이런 세력과는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건 국가가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진실을 중시해야 합니다. 선동가가 아닌 전문가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기본 가치가 자유라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과는 협치나 타협이 가능하지만, 자유를 제거하려는 사람들, 거짓 선동과 협박을 일삼는 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발언이 국민과 야당에 대한 선전포고로 읽혔습니다.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던 재야·학생 운동권을 불순 세력, 용공 세력으로 몰아 탄압하던 논리를 빼다 박았습니다. 극우 소수 정당의 강령이나 당헌과 무척 닮았습니다.
‘자유를 제거하려는 사람들’ ‘거짓 선동과 협박을 일삼는 세력’이 누구인가요?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당, 언론, 사람들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자유를 제거하려는 사람은 바로 윤석열 대통령 아닌가요? 거짓 선동과 협박을 일삼는 세력은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 사람들, 그리고 국민의힘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핵심 관계자)들 아닌가요?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얼마나 꽂혔는지는 지난 15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후보 시절부터 말한 자유민주주의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분들이 많은데 오늘 회의를 통해 선택의 자유,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 의식, 그리고 공통분모가 되는 법치 등이 우리 정부의 국정과제와 국정철학을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 답변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견강부회입니다. 국정과제와 자유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극우 노선은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대 52시간인 현행 노동시간을 대폭 늘리는 방향으로 정부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파업 기간에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선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인 이른바 ‘문재인 케어’를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인기영합적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비난하며 폐기 방침을 밝혔습니다. 그런가 하면 윤석열 사단이 장악한 검찰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수사의 칼날을 이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겨누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처음부터 이른바 ‘꼴통 극우’는 아니었습니다. 최근의 극우 행보가 그의 진짜 신념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짐작건대 취임 초 몇가지 실정으로 하락한 국정 지지율을 만회하려는 목적일 것입니다. 반노동, 반복지 노선과 전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로 보수 성향 유권자를 결집하려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 화물연대 제압을 계기로 국정 지지율이 약간 반등하자 “아하,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할까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것입니다. 왜냐고요?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는 지나치게 이념적입니다. 철 지난 색깔론입니다.
지금은 박정희·전두환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하고 예민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밀림을 헤치고 나갈 장검이 아니라 외과 의사가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수술용 칼이 필요합니다. 영국 속담에 ‘유능한 외과 의사는 사자의 심장, 숙녀의 손, 독수리의 눈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는 것은 사자의 심장뿐입니다. 곰의 손, 코뿔소의 눈을 가진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당부합니다. 이른바 보수 신문 논객들의 얄팍한 칭찬에 놀아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윤석열 대통령을 부추겨 자신들의 이익을 취한 뒤 윤석열 대통령을 버릴 것입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마시고 중심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태극기 부대의 장군이 아닙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입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