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전원위원회 첫날 회의에서 김영주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4월10일부터 13일까지 나흘 동안 국회의원 선거제 개선을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가 열렸습니다. 100명의 의원이 본회의장 단상에서 정치개혁에 대한 각자의 소신을 밝혔습니다.
이제 전원위원회 소위원회나 정치개혁특위에서 좀 더 구체적인 논의와 타협과 절충에 돌입할 것입니다. 전망은 불투명합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도시와 농촌의 이해가 워낙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합의에 따른 정치개혁 성과를 꼭 이뤄내면 좋겠습니다.
이번 국회 전원위원회 토론의 쟁점을 거칠게 정리하면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지역구를 소선거구제로 유지하느냐, 중대선거구제나 도농복합선거구제로 바꾸느냐입니다. 둘째,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느냐, 줄이느냐입니다. 지역구 문제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늘은 비례대표 문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비례대표제는 각 정치세력에 대한 선거권자의 지지에 비례하여 대표자의 수를 배분하는 선거 제도입니다. 사표를 양산하고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다수대표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창안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처음 생긴 것은 1963년이었습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이전 국회의원선거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제안 이유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연·혈연의 폐를 방지하기 위하여 소선거구에 다수대표제와 전국선거구에 비례대표제를 병용하고…”
국회의원선거법에 “의원의 선거구는 지역선거구(이하 지역구라 한다)와 전국선거구(이하 전국구라 한다)의 2종으로 한다”, “전국구의 의원 정수는 지역구에 의하여 선출되는 의원 정수의 3분의 1로 한다”, “제1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이상일 때에는 각 정당의 득표 비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분한다”, “제1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미만일 때에는, 제1당에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분하고, 잔여 의석을 제2당 이하의 정당에 득표 비율로 배분한다”는 등의 조항이 만들어졌습니다.
쿠데타 세력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의석 배분 방식이었습니다. 이 법에 따라 1963년 6대, 1967년 7대, 1971년 8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들이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이마저도 못마땅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에서 전국구를 없애고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유신정우회(유정회)라는 교섭단체로 활동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이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유정회 의원 후보는 의장이 일괄 추천하도록 했으니 유정회 의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73년 9대, 1978년 10대 총선이 그렇게 치러졌습니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박정희 정권 못지않았습니다. 1980년 5공 헌법에 “국회의원의 선거구와 비례대표제 기타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고 비례대표제를 헌법 사항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리고 1981년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기존 국회의원선거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지역구는 2인씩 뽑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하고, 지역구 의석의 50%를 뽑는 전국구는 지역구 1위 정당에 3분의 2를 몰아주도록 했습니다. 자신들이 창당한 민정당이 안정 의석을 확보하도록 한 꼼수였습니다.
그 뒤 1991년 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은 지역구 의석 비율로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도록 했고, 1994년 통합 제정된 공직선거법은 지역구 선거 득표 비율 기준으로 바꾸었습니다. 2000년 개정 공직선거법은 전국구라는 명칭을 비례대표로 바꾸었습니다. 200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각각 투표하는 1인 2표 정당명부제가 2004년 총선에 도입됐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전국구·비례대표는 이처럼 애초에 쿠데타 세력이 국회 안정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꼼수로 도입한 제도였지만, 일단 제도 도입 이후에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 전체 선거를 지휘해야 하는 각 당 지도부의 국회 입성 통로로 활용됐습니다. 둘째, 정치 경험이 없는 신인이나 여성, 청년, 장애인 등 소수자들을 발탁하는 장치로 활용됐습니다.
나이가 좀 있는 독자분들은 우리나라 유력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가 전국구·비례대표 의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5년 12대 민정당 전국구 3번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8년 13대 평민당 전국구 11번, 1992년 14대 민주당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됐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4대 민자당 전국구 1번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14대 민자당 전국구 25번으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회창 총재도 1996년 15대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이었습니다. 김종필 총재는 2000년 16대 자민련 비례대표 1번으로 9선 고지에 올랐습니다.
1인 2표 정당명부제가 도입된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여성을 홀수 번호에, 남성을 짝수 번호에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여성이 이 제도 덕분에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당선자 중에는 김명자, 박영선, 김현미, 김영주 의원 등이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에는 나경원, 진수희 의원 등이 있었습니다. 유승민 전 의원도 이때 비례대표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은 심상정 의원, 8번은 노회찬 의원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19대 새누리당 11번으로 5선 의원이 됐습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19대 새누리당 13번 당선자였습니다.
2012년 19대 총선 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졌습니다. 2013년에는 이석기 의원 사건이 터졌고, 2014년에는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련의 사건으로 비례대표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이 나빠졌습니다.
하지만 2016년 20대 총선,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많은 사람이 비례대표로 정치에 입문했고 지금도 활발히 의정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전국구·비례대표만으로 11·12·14·17·20대 5선 국회의원을 한 사람입니다.
60년 전인 1963년 처음 도입한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출 제도가 이제 우리나라 정치의 한 축으로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유권자들이 비례대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오랫동안 제왕적 대통령제를 겪으며 고질이 된 정치 혐오증 때문입니다. 사실은 비례대표 의원들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과 국회를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한 사람 잘 뽑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반정치주의입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기현 대표는 이 자리에서 국회의원 의석수를 30석 이상 줄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연합뉴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4·5 재·보궐선거 직후 의원 정수를 30명 이상 줄일 수 있다고 치고 나온 것은 유권자의 이러한 심리를 겨냥한 ‘반정치주의 포퓰리즘’입니다. 최근 국회 전원위원회에서 비례대표 의원 정수 축소나 폐지를 주장한 의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감정을 핑계로 정치개혁을 가로막으려는 속셈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례대표제의 효용성은 헌법학자들도 인정합니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의 <헌법학>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비례대표제는 소수자 보호의 원리와 투표 가치의 실질적 평등에 충실하지만, 대의제 이념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도 있다. 그러나 비례대표제가 적절한 방법으로 운용될 경우 사회 제 세력에 상응한 대표를 형성하고, 정당 사이에 경쟁을 촉진하여 정치적 독점을 배제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비례대표제의 효용성은 최근 들어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첫째, 지방 소멸 때문입니다. 둘째, 정치 양극화 때문입니다. 비례대표제를 강화해서 다당제 출현을 유도해야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방 소멸을 막을 수 있습니다. 두개의 거대 정당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정치 양극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외국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승자 독식 소선거구제의 폐해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정치 양극화와 포퓰리즘으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은 대연정 경험까지 쌓이면서 미국이나 영국과 반대로 경쟁 정당에 대한 적대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비례대표제의 부작용은 권역별 비례대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방형 명부제(유권자가 정당이 아닌 비례대표 후보 개인에게 투표), 중복 출마(지역구·비례대표 동시 출마 허용), 석패율제(지역구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구제) 등 다양한 제도적 보완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지난 12일 전원위원회에서 최인호 민주당 의원이 선거제 합의를 위한 최고위급 정치협상을 제안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만나서 화끈하게 합의하고 정치개혁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제 개선을 위한 의원들의 공감대는 꽤 이뤄졌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결단입니다. 여야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