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4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회원들이 제3자 변제를 반대해온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을 대상으로 외교부가 공탁 절차를 개시한 것에 항의하는 서한을 전달하러 민원실로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피해국 정부가 난데없이 가해국과 가해 전범기업의 법적 책임을 면해주겠다고 나섰다. 자국 최고법원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었다. 가해국도, 가해 전범기업도 사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피해국 정부는 고령인 자국민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돈을 들이밀었다. 거부하면 ‘스토킹’하듯 연락하고 찾아가 압박했다. 그러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돈을 법원에 맡기겠다고 나섰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자국 법원에 맞서 소송도 불사하겠단다. 피해국 정부가 자국민 피해자와 자국 법원을 상대로 벌이는 이 기이한 ‘역사 투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언제든 판결금 수령하실 수 있다”
“공탁을 통해서라도 언제든 판결금을 수령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게 피해자들의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정부는 재단과 함께 공탁 이후에도 피해자와 유가족 한분 한분께 정부 해법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진정성 있는 노력을 지속해서 기울여나갈 예정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2023년 7월3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앞서 정부는 2018년 일본 가해 전범기업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심규선·이하 재단)을 통해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해법’(제3자 변제안)을 2023년 3월6일 발표했다. 열흘 뒤 일본 도쿄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에 나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를 ‘옛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 부르며 강제동원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약 4개월간 피해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정부 해법과 그간의 경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드리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적극 기울여왔다”며 “그 결과 피해자 15명 가운데 생존 피해자 1명을 포함해 모두 11명이 정부 해법을 수용하고 판결금을 수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생존 피해자 2명을 포함해 판결금을 받지 않은 피해자(유가족 등) 4명에 대해 공탁절차를 개시했다”며 “언제든지 판결금을 수령하실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민법 제487조는 “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아니하거나 받을 수 없는 때에는 변제자는 채권자를 위하여 변제의 목적물을 공탁하여 그 채무를 면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외교부 쪽은 2023년 5월 말까지만 해도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공탁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외교부 당국자는 “정부가 해법을 이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시민모금 운동이 전개되는 것은 또 다른 국면이라 보고, 이런 상황에선 공탁을 미룰 것이 아니라 일단 공탁금을 납입하고 시간 여유를 갖고 피해자들의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2023년 6월29일 전국 600여개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을 위해 시작한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 운동이 공탁에 나선 결정적 이유란 얘기다. 대법원 확정판결 이행 지연에 따라 불어나는 연간 20%에 이르는 지연이자도 공탁을 서두른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 면밀한 법률적 검토? 당사자 반대하면 제3자는 변제 못해
“정부 해법에 반대하는 생존 피해자와 유족들은 정부안 발표 뒤 재단과 피고(가해 전범기업)를 상대로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가 담긴 내용증명을 보냈다. 따라서 재단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채권을 변제할 수 없으며, 법적 효력도 없다.”
같은 날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소송대리인인 김세은 변호사는 정부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실제 민법 제469조는 1항에서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한다. 같은 조 2항은 아예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다.
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광주·수원 지방법원 등지에서 정부와 재단이 낸 공탁 신청이 수리되지 않았다. ‘제3자 변제안’ 발표 때도, 공탁 신청 때도 “면밀한 법률적 검토를 거쳤다”던 정부는 불편한 심기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외교부는 자료를 내어 “강한 유감을 표한다. ‘불수리 결정’은 법리상 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즉시 이의절차에 착수해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해 전범기업의 책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2018년 대법원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불법이며, 강제동원은 불법행위로 가해 전범기업이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일본 정부의 압박 속에 가해 전범기업은 대법원 판결 이행을 거부했다. 그걸 윤석열 정부가 대신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
과거사 문제의 법적 쟁점에 천착해온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적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단이 나서 일본 가해 전범기업의 책임을 면해주기 위해 피해자에게 돈 받으라고 압박했다. 결국 피해국 정부가 자국민인 피해자를 돈으로 압박한 셈”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 30년 넘는 싸움으로 끌어낸 판결을
“그마저 실패하니 공탁에 나선 거다. 그런데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불수리 결정이 내려지니 이번엔 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겠다고 벼른다. 피해자들은 30년 넘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오랜 싸움 끝에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정작 피해국 정부는 그 판결을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급기야 90살, 100살 피해자들에게 다시 법정 다툼을 하겠다고 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보는 게 참담할 뿐이다.”
‘공탁 소동’은 뜻밖의 결과를 불렀다.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justicekeeper.kr)에 불이 붙었다. 누적 모금액 첫 집계를 한 7월3일 오후 6시까지 5420만9096원(208건)에 그쳤던 모금액은 정부의 공탁 개시 소식과 함께 4일 낮 12시 1억306만2062원(1401건)으로 급증했다. 7월6일 낮 12시 현재 모금액은 2억354만7099원(2781건)으로 다시 2배가량 늘었다. 정부의 ‘기이한 투쟁’에 대한 무언의 화답으로 읽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