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진 서울대 교수·사회학
[김대중과 나]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에 불멸의 공적을 남기고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가 처음 대면한 것은 1988년 총선에서 당시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한 직후였다. 나는 국립대 교수로서 야당을 돕는 것이 나라를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92년 대선 때는 초빙교수로 가르치던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시 귀국하여 텔레비전 찬조연설을 했다.
그러나 내가 김 전 대통령과 떨리는 울림으로 대화하고 공감했던 것은 93년 2월이었다. 그는 정계은퇴 선언을 한 후 영국으로 떠나 캠브리지 대학 근처에 칩거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베를린 사회연구원(WZB)에 있게 되어 2월6일 예고 없이 그를 찾아갔다. 이것이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반겼다. 그가 외로웠던 탓일까? 그는 마음 속 깊이 싸여 있던 슬픔, 분노, 감정의 응어리들을 토해냈다. 조선시대 이래 개혁정치의 어려움, 지역감정의 가공할 피해, 그를 향한 용공시비의 억울함, 그와 함께 역경을 나눈 동지들에 대한 감사, 그를 눈물로 배웅했던 국민들의 한과 열망을 반복해서 언급하면서 그는 스스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자 감격이었다.
2월7일, 김 전 대통령 내외분과 수행비서 그리고 나는 런던으로 나가 하이드 파크를 산보했고 한인교회에서 주일 미사에 참석한 후, 주영 대사관저에서 이홍구 대사를 만났다. 이 대사는 나도 잘 아는 사이여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 만남은 짤막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지적인 탐구의 연속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유럽공동체에 관해 질문이 많았다. 통일문제로 화두를 옮기자 북한의 경제실정, 권력이양, 핵 문제, 동북아 국제정치 등에 관하여 자세하게 묻고, 전 통일원 장관이었던 이 대사의 의견을 경청했다. 아울러 교육문제에 관하여 한국과 영국의 차이를 주의 깊게 검토했다.
3시간에 걸친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그날의 만남은 대학 어디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대화의 성찬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연구하는 지식인의 진면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통상적 의미의 정치인이 아니었다.
같은 해 2월24일 그는 베를린 사회연구원의 초청을 받아 <독일통일 경험과 한반도 전망>에 관해 영어로 주제발표를 했다. 그는 이때 3단계 통일방안을 처음 공식화했다. 아울러 독일 교수들의 날카로운 질문들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다음날 그는 독일경제연구소를 찾아가 독일통일의 후유증에 관해 연구책임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울러 동베를린의 삼성전관공장, 그곳 노동자 가정 등을 방문하여 독일 통일의 이모저모를 직접 확인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김 전 대통령이 남북한 화해와 통일의 길을 구상하게 된 최초의 현장을 나누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되어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경협, 남북한 교류왕래, 긴장완화 등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아울러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미래의 인물이다. 한 보기로, 그가 1997년 9월26일, 대선 후보로서 서울대 학부 강의에 초빙되어 행한 <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 강연과 일련의 후속 토론은 그가 탐구한 지식의 결실이 인류의 미래에 어떤 자산이 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대통령 재임 시 그는 한반도를 통한 유라시아 문명을 꿈꾸었으며, 보편적 세계주의로 인류의 미래를 설파했다.
영면하기 전 그는 한반도와 함께 중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008년 4월4일, 당시 서울대를 방문한 독일의 석학 울리히 벡 교수와 나눈 중국의 미래에 관한 대화는 김 전 대통령의 당당한 지식인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이런 높은 경륜과 혜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안타깝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자 훌륭한 정치인이었지만 나는 그를 탁월한 지식인으로 본다. 미래를 향한 그의 사상과 윤리를 잘 확립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영면하기 전 그는 한반도와 함께 중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008년 4월4일, 당시 서울대를 방문한 독일의 석학 울리히 벡 교수와 나눈 중국의 미래에 관한 대화는 김 전 대통령의 당당한 지식인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이런 높은 경륜과 혜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다. 안타깝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자 훌륭한 정치인이었지만 나는 그를 탁월한 지식인으로 본다. 미래를 향한 그의 사상과 윤리를 잘 확립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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