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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민추협 시절 ‘연애같았던’ DJ-YS의 ‘40년 애증’

등록 2009-08-20 19:32수정 2009-08-20 21:17

김대중, 김영삼.  (1996년 6월 18일 수집)   3.6전면 해금조치로 5년만에 동교동에서 만난 김대중 김영삼씨가 활짝 웃으며 포옹하고 있다.
김대중, 김영삼. (1996년 6월 18일 수집) 3.6전면 해금조치로 5년만에 동교동에서 만난 김대중 김영삼씨가 활짝 웃으며 포옹하고 있다.
민추협 시절엔 ‘연애하냐’ 오해샀을 정도
YS, 조문 뒤엔 “감정 봄눈 녹듯 스르르”
“두 사람을 한 시대, 한 무대에 세운 보이지 않는 손의 장난이 참으로 얄궂기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는 자서전 ‘동행’에서 남편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인연을 이렇게 적었다.

경남 거제의 갑부집 아들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야당의 주류로 탁월한 ‘감’을 지녔던 김영삼. 전남 외딴섬 하의도 소작농의 아들로 자수성가해 뛰어난 언변과 분석력을 지녔던 김대중. 두 사람의 인연은 모질고 깊었다. 40년 가까이 경쟁하고 협력하며, 다투고 질시했다. 한국 현대사의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첫 대결은 신파의 김대중과 구파의 김영삼이 겨룬 68년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이었다. 김영삼의 승리였다. 두번째 대결인 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은 이철승과 손잡은 김대중의 역전승이었다. 김영삼은 당시 당선 수락 연설문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유세에도 참여했다. 이희호씨는 회고록에서 “아름다운 패자의 모습”이라고 회상했다. 경쟁의 관계였다.

박정희 치하에서 두 사람은 서로 약점을 채워가며 함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동지적 관계였다. 김대중 납치테러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73년 9월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 본회의에서 “전모를 밝히지 못하면 김종필 국무총리 등 내각이 총 사퇴해야 한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서로 너무나 달랐지만 사이는 참 좋았어요. 와이에스(김영삼)가 종종 디제이(김대중)에게 ‘니는 도대체 쉬운 것도 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노?’ 하고 농을 걸었고, 그럼 디제이는 ‘자네는 말이여, 매사를 너무 쉽게 생각한당게~’라고 맞받았죠.”박찬종 전 의원의 회고다.

전두환 신군부 등장 뒤에도 두 사람은 각각 해외 추방과 가택 연금 상태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84년 9월엔 힘을 합쳐 민주화의 요람이 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꾸려 공동의장이 됐고, 85년 1월엔 신민당을 함께 창당해 공동의장을 맡는다. 이해 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귀국하면서 두 사람의 반독재 투쟁 협력은 복격화한다. 박종웅 전 의원은 “당시 민추협 사무실이 청계광장 근처에 있었다. 매일 회의하며 보는 데도 가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걸어가시다가 두 분이 마주치면 서로 손을 흔들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악수하곤 했다. 오죽했으면 비서들끼리 ‘두 사람이 동성연애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87년 시민들과 함께 쟁취해낸 대통령직선제를 두고 갈라졌다. 대선후보 단일화 실패 뒤 틈새는 더욱 커졌다. 다툼과 질시의 관계가 시작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김대중이) 단일화 대신 신당(평민당)을 창당해 뒤통수를 쳤다”고 맹비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당시 어른께 양보하시라고 어렵사리 권유했으나 어른은 ‘김대중이 되면 군부가 어떤 식으로든 발호한다’는 신념이 매우 확고했다”고 말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 쪽은 앞선 자질을 내세웠다.

결국 그해 12월 대선에 각각 나선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각각 633만여표와 611만여표를 얻어 828만여표의 노태우 후보에게 어렵게 얻은 직선제의 열매를 고스란히 넘겨줬다. 결과론적이지만 불과 1% 포인트(22만표) 차에 불과한 팽팽한 세력관계가 두 야당 지도자의 눈을 멀게 했고, 결국 둘의 운명도 갈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거 뒤 “국민들의 염원을 위해 양보했어야 했다”고 회한에 젖었다고 한다.

90년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정당, 공화당과 3당합당을 하며 민자당-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여당의 길을 택했다. 그 결과 92년 14대 대선에서 먼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눈물의 정계은퇴 선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계복귀 뒤 97년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대선을 두달 앞두고 불거진 이른바 ‘디제이 비자금’ 사건의 수사를 대선 뒤로 유보하겠다고 발표해 김대중 전 대통령 대선 행보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해줬다. 두 사람의 화해 가능성이 엿보인 대목이었다. 그러나 한보비리 사태로 구속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의 사면 문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급랭했다. 이후론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너무 달랐다. 이희호씨는 “독재 앞에선 동지였으나 그 밖의 문제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박찬종 전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각 분야의 담당에게 일을 전폭 일임하며 책임감을 실어주었다면, 엄청난 독서가로 여러 분야에 해박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식과 논리의 카리스마로 참모들을 휘어잡았다”고 말했다.

이제 한 사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40여년 애증의 인연은 끝을 맺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일주일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병상을 찾아 “이제 화해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한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여의도연구소부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어른이 그러시더군요 ‘너무 기분이 이상하다. 조문해 이희호 여사를 만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갖가지 감정들이 봄눈 녹듯이 녹더라. 큰 역할을 한 인물인데 이렇게 가니 너무나 안타깝고 아쉽다’고요.”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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