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조사실을 참관하기 위해 지난 5월4일 오후 서울 남부지검을 방문한 김승규 법무부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전자조사실을 참관하기 위해 지난 5월4일 오후 서울 남부지검을 방문한 김승규 법무부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http://img.hani.co.kr/section-kisa/2005/06/15/N_02407605_20050504.jpg)
전자조사실을 참관하기 위해 지난 5월4일 오후 서울 남부지검을 방문한 김승규 법무부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과거정권 ‘잘 나가던’ 호남형제 세쌍…국정원장 내정 앞두고 설왕설래
‘잘 나가는’ 형제 세쌍이 있었다. 비슷한 연배에 호남 출신인 이들은, 특히 이전 정권인 ‘국민의 정부’ 시절, 형제끼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요직’을 달리는 공통점이 있었다. “호남 출신도, 타 지역 출신도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의 ‘관운’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국민의 정부가 끝나고, 참여정부가 들어섰다. 정권이 바뀐 것이다. 이들은 형제 가운데 1명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옥으로 향했다. 혐의는 모두 뇌물수수. 그러나 ‘살아 남은’ 형이나 아우들은 노무현 정권에서도 요직을 맡으며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김승규(61) 법무장관이 15일 국정원장 유력설의 주인공이 되면서, 잘 나가는 형제 세쌍의 얘기가 다시 화제다. 감사원 감사가 한창인 ‘행담도 의혹’으로 손학래(63)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입길에 오르면서 한축을 거들고 있다. △김명규(63)-김승규 △손학래-손영래(59) △김성훈(66)-김성호(59) 형제는, 관가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다.
김명규-승규, 손학래-영래, 김성훈-성호…정권 바뀌자 엇갈린 운명
‘장관 부럽지 않은 청장 형제.’ 김대중 정권 말기인 지난 2001년 9월, 손씨 형제가 나란히 차관급인 철도청장과 국세청장에 임명됐을 때 관가에서 나온 평가다. 김대중 정권 때 언론사 세무조사 등으로 얼굴이 익히 알려진 동생 영래씨는, 정권이 바뀌면서 ‘급전직하’의 운명을 맞았다. 노 대통령의 후원자로 잘 알려진 문병욱 회장의 썬앤문그룹을 특별세무조사할 당시 감세를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2003년 12월 구속수감된 것이다. 나중에는 에스케이그룹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한테서 “회사가 잘 되도록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뇌물 2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추가됐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4년)를 선고받기는 했지만, 10개월 남짓 영어생활을 견뎌야 했다.
반면, 형인 학래씨는 그 뒤로도 줄곧 철도청장으로 재직하다 2004년 6월 한국도로공사 사장에 임명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최근 ‘행담도 의혹’이 불거지면서 감사원의 조사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김대중 정권에서 농림부 장관(1998년 3월~2000년 8월)을 지낸 김성훈씨는 현재 상지대 총장으로 가 있다. 그는 장관 재직 때 <한겨레21>이 뽑은 국민의 정부 장관 평가에서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형제의 경우에도 정권 교체와 함께 관운이 꺾인 쪽은 동생이었다. 국세청에서 잔뼈가 굵은 성호씨는 국민의 정부에서 마지막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기가 무섭게, 2003년 3월 그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불려갔다.
형제 가운데 한 명씩 감옥행…죄목은 하나같이 ‘수뢰’
경인지방국세청장에 이어 서울지방국세청장으로 있을 때 관할 4개 기업체에서 ‘취임 축하금’ 명목으로 각각 1천만원씩, 모두 4천만원의 뇌물을 받아 챙긴 혐의가 드러난 것이다. 검찰은 ‘직전 정권의 장관’이란 직함이 부담스러웠던지 “고위 공직자 구속기준인 5천만원에 못미친다”면서 불구속 기소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법원의 잣대는 달랐다. 김씨는 2003년 3월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이들 세쌍의 형제 중에서도 참여정부 들어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들은 단연 김명규-승규 형제다. 각자의 행로가 극과 극으로 갈린 탓이다. 제14, 15대 의원을 지낸 형 명규씨는 정권이 교체되고 얼마 뒤 서울지검에 소환돼 2003년 5월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가스공사 사장을 지낼 때 가스운송업체 사장한테서 청탁과 함께 현금 4천만원과 미국돈 1만6500달러, 비상장 주식 5000만원 어치를 받은 혐의가 드러난 것이다. 구속된 세 사람 중에서는 수뢰액수가 가장 많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승규씨는 지난해 7월 법무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정권 교체와 동시에 2003년 3월 부산고검장 자리를 내놓고 관가를 떠난 지 1년4개월만이었다. 그는 애초 검찰에서 그리 ‘잘 나가던’ 사람이 아니었다. ‘검사의 꽃’이라는 검사장 승진에서도 동기(사시 12회) 중 ‘막차’를 탔다. 김종구 법무장관이 문민정부 마지막 검사장 인사(1997년 가을)에서 서울고검에 있던 김승규, (나중에 검찰총장을 지낸) 김각영 두 사람을 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검찰에서는 “김 장관이 직전 보직인 서울고검장으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두 사람을 ‘구제’해준 것”이라는 게 중평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법무차관 → 대검차장 등 핵심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 했다.
법무부 사람들이 김 장관을 ‘김 주사’라고 부르는 사정
변호사 시절, 그는 기독교인 변호사들을 모아 ‘법무법인 로고스’를 만들고 대표 변호사를 지냈다. 당시 그는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수뢰)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배임 등) △박광태 광주시장(수뢰) △부영 이중근 회장(배임 등)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아 검찰 청사를 출입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당시는, 갓 개업한 ‘호남 검사장’ 출신 변호사가 드물던 덕분에 김 장관이 그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렸다”면서 “특히 호남출신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사건을 많이 맡았다”고 기억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한 사건 관련 핵심 참고인의 진술을 번복하려 했다는 의혹을 산 적이 있고, 이런 내용은 해당 참고인의 진술조서에 남아 있다.
그가 강금실 장관에 이어 법무장관에 임명되자, 검찰 안에서는 “아무리 ‘연좌제’가 없는 민주국가라지만, 형(명규씨)이 얼마 전 수뢰사건으로 기소된 마당에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인사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김 장관은 과천 법무부 청사 안에서 한 때 ‘김 주사’로 통했다. “개혁과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꼼꼼히 챙긴다”(법무부 관계자)고 해서 직원들이 붙인 별명이다. 직전인 강 장관을 떠올리면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김 장관은 부임하자마자, 강 장관 때 장관 직속으로 설치했던 정책기획단을 기획관리실장 산하로 격하시켰다. 정책기획단은 법무·검찰 개혁과제를 연구하고 제안하는 기구였다. 또 자신이 변호인으로 있을 때 ‘악연(?)’을 맺은 검사들은 모두 한직이나 지방으로 보내, “외모와는 영 딴판”이라는 평가도 얻었다.
무색무취 예스맨, 민족명운 걸린 북핵·한미관계 다룰 적임인가?
국정원과 경찰이 모두 스스로 과거사 규명에 나서는 데도, 법무부와 검찰은 ‘무풍지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태도의 중심에는 김 장관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김 장관은 서울지검 형사5부장이던 1992년 10월, 5·18민중항쟁동지회가 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의 고소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했다. 무혐의 결정문도 김 장관 자신이 썼다. 검찰은 1995년 수사를 재개해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을 비롯한 주모자들을 기소함으로써, 김 장관의 당시 처분을 뒤집었다.
이런 이력으로 인해, 김 장관이 개혁적 인사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검찰 외부는 물론, 검찰 안에서도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더 많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김 장관은 좋게 말해 무색무취한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개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이 민족의 명운이 걸린 북핵 문제나 한미 관계 등을 두루 다룰 중책에 걸맞은 사람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같은 당의 또다른 의원도 “이 정권의 ‘인력풀’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도 “김 장관은 기본적으로 ‘예스 맨’”이라며 “그의 관운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정치부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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