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에게 정상회담을 직접 제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⑤
1993년 2월25일 텔레비전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식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제부터 이 땅에 인간적 정치, 따뜻한 정치, 체휼의 정치가 이뤄지길 바랐다.
흔히 김 대통령을 두고 ‘감의 정치인’이라고들 했다. 머리를 굴리는 정치인이 아니라 가슴의 느낌을 중시하고 포용하는 정치인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의 감이 고통을 함께하는 동고심(同苦心)의 정치로 표출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군사정부에서는 권위는 없고 권위주의만 판치는 슬픈 정치가 펼쳐졌다. 국민들에게는 무서운 밤의 정치로만 군림해왔다. 이에 새 대통령은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취임사를 작성하면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긴 대목은 통일과 평화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메시지는 듣는 이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줄 만큼 감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김일성 주석에게 직접 던지는 메시지를 담았다.
“7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저는 역사와 민족이 저에게 맡겨준 책무를 다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통일지상주의가 아닙니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입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계는 대결이 아니라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날 취임사에서 전세계, 특히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은 바로 이 대목,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주목했을 것이다. 평양 당국도 김일성 주석에게 직접 던진 평화통일 메시지, ‘민족 당사자 원칙’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정상회담을 과감하고 신선하게 제의한 것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남과 북에서 완고하게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냉전수구세력 역시 그들 나름대로 이 메시지를 듣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선언에서 ‘동맹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어제 북한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와 중국이 오늘 대한민국의 우방으로 바뀌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 주목하라는 뜻이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이 절박한 역사적 과제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따라서 남쪽의 냉전보수 인사들이 이 ‘동맹국’을 미국과 일본으로 속단하고, 북한을 미국과 일본보다 소중한 국가적 실체로 선포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은 분명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또 김 주석에게 만나자고 제안한 것은 핵문제야말로 7천만 민족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참으로 중대한 사안이므로, 남북 당사자가 가슴을 활짝 열고 우선적으로 대화하고 협의해 해결하자는 뜻이었다.
돌이켜 보면,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오늘까지도 내게 악의에 찬 오해와 비난이 쏟아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비난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한 신념으로 이러한 평화의 열정을 더욱 키워가고 싶다. 다만 당시에는 새 대통령이 그 열정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 박관용 비서실장이 이력서와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내일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임명장 수여를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2월26일 초대 통일부총리로 취임했다. 그 며칠 지나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평양의 반응이 흥미롭게도 김 대통령(장로)이 속해 있는 복음주의 개신교단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통일운동에 몸을 던진 조동진 목사가 김 주석을 직접 만나서 받은 메시지를 가지고 서울에 왔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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