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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북한 NPT 탈퇴 선언 취임뒤 첫 시련 / 한완상

등록 2012-05-21 19:46수정 2012-05-21 21:29

1993년 3월15일 김영삼 대통령(가운데)과 필자(오른쪽)가 통일원 첫 업무보고를 위해 청와대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사흘 전인 12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남북관계의 긴박한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1993년 3월15일 김영삼 대통령(가운데)과 필자(오른쪽)가 통일원 첫 업무보고를 위해 청와대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사흘 전인 12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남북관계의 긴박한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⑥
* NPT : <핵확산금지조약>

1993년 2월26일 초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 취임할 즈음 나는 통일정책과 통일원의 상황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바탕으로 의욕에 넘쳤다. 그러나 3월 중순 이런 의욕과 사명감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앞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3월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이 위기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앞서 2월26일부터 3월12일까지 열흘간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노태우 정부로부터 이월된 ‘통일’ 관련 현안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현안은 북한 핵개발과 관련된 한-미 합동 팀스피릿 훈련 중단 문제였고, 둘째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 북한 송환 문제였다.

먼저 북한의 핵개발 경위를 간략히 살펴보자. 62년 북한은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웠다. 이듬해 6월에는 소련으로부터 소규모 연구용 원자로(IRT-2000)를 도입했다. 이후에 74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다. 당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회원국이 아니었기에 ‘전면적 안전조치 협정’이 아닌 ‘부분적 안전조치 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남한의 원전 개발에 자극을 받은 북한은 이때부터 경수로 도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85년 12월에 이르러 소련과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경제기술협정을 맺으면서 북한은 440메가와트(MWe)급 소형 경수로 원전 4기를 도입하려고 했다. 이때 소련이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라는 조건을 달았고 이에 북한은 바로 가입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조약에 가입하면 18개월 안에 전면적 안전조치 협정을 의무적으로 체결해야 하는데 북한은 이를 계속 미뤘다. 이에 핵확산금지조약은 당연히 북한이 핵개발을 숨기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 와중에 91년 12월 소련체제가 붕괴하는 바람에 북한의 경수로 도입도 중단되고 말았다.

이와 별로도 89년 9월 프랑스의 상업위성에서 영변 핵단지를 촬영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혹과 우려가 증폭되었다. 사진에는 북한이 87년부터 자체 개발한 5메가와트급 실험용 흑연감속로뿐 아니라 50메가와트와 200메가와트 흑연감속로 시설, 그리고 방사화학실험실로 알려진 핵재처리시설 건설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에 90년 2월 원자력기구 이사회는 북한에 하루빨리 전면적 안전조치 협정을 맺고 사찰을 수용하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남북한은 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대화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간의 냉전 대결을 유지하고 강화해온 ‘3각 동맹’의 해체를 겨냥한 듯한 한국식 북방정책을 시도했다. 그 하나가 남북한 교차승인 추진이었다. 남한은 러시아·중국과, 북한은 미국·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정책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과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국제적으로 불거진 북한 핵문제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셈이다.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었다.

이런 한반도의 훈풍은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의 탈냉전 정책 덕분이기도 했다. 91년 3월27일 부시 대통령은 해외 전술핵무기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노태우 정부는 91년 11월8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남과 북은 판문점에서 3차에 걸쳐 핵협상을 벌인 끝에 91년 12월31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이르렀다. 그 한달 뒤인 92년 1월30일 북한은 마침내 원자력기구와 핵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했다.

92년 1월7일 우리 정부는 북한이 그토록 반대해온 팀스피릿 군사훈련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보름 뒤인 1월22일에는 미국이 처음으로 뉴욕에서 차관급 북-미 고위급 접촉을 시도했다. 92년 1월19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효되자 한-미는 남북간 상호사찰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때는 미국도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 원칙’을 존중한 셈이다.

한완상 전 통일·교육 부총리
한완상 전 통일·교육 부총리
92년 3월19일 남북은 1차 핵통제공동위원회를 열고 상호사찰의 범위와 방법, 절차 등을 논의했다. 그 뒤 본회의 13회, 위원 접촉 8회를 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북한이 이른바 의심 시설에 대한 사찰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한결같았다. 의심 시설이 핵시설이 아니라 군사시설이라는 것이었다. 끝내 북한은 남한이 주장했던 특별사찰마저 거부했다.

한완상 전 통일·교육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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