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6일 대사면 조처에 따라 가석방된 문익환 목사가 생애 마지막이자 여섯번째 옥살이를 한 경북 안동교도소에서 나오며 환영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출범을 기념한 이날 사면은 건국 이후 최대 규모로 안팎의 환호를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⑨
1993년 3월12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돌발 폭탄’이 터지기 며칠 전인 3월6일에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지난해 연말 대통령 당선 직후 약속했던 대로 새 정부 취임 기념으로 대사면을 단행한 것이다. 그때까지 정부 수립 이후 최대 규모인 무려 4만1886명이 형을 면제받아 풀려나거나 사면됐다. 그중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 시국사범 5800여명도 포함돼 있었고, 그 가운데 144명은 구속집행정지 등으로 가석방됐다. 애초부터 새 정부의 통일정책을 우려했던 수구세력과 달리, 김영삼 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고 축복해준 민주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그날 안동교도소에서 풀려난 문익환 목사는 새 정부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아쉬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89년 4월 방북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90년 10월 1년6개월 만에 병환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가석방됐던 그는 그해 5월 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된 상태였다.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을 주도하고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강경대 열사 장례위원장 등을 맡아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생애 마지막이자 6번째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문 목사는 그날 정오께 안동문화회관에서 열린 석방 기자회견에서 맨 먼저 “사면의 폭이 좁아 장기수를 비롯한 많은 양심수가 석방되지 못한 것이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 정부 안에 남아 있는 반통일 반민주 공안세력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했다. 그들과 함께하는 개혁이 과연 제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 비관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때는 민주화 대열에 함께 섰고 지금도 민주 열정이 남아 있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한 분”(<한겨레> 3월7일치)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실패했는데 김영삼씨까지 실패하는 대통령으로 만들 수 없다”(<국민일보> 3월6일치)고 새 정부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표명했다. 그리고 나를 통일 부총리로 기용한 것은 매우 환영할 일이라면서 새 정부에 남북관계 개선을 주문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남북 민중의 통일 열기가 높은 이때 새 정부는 공안세력의 방해를 뚫고 국민 대중의 자주적 통일운동에 기대어 남북관계를 크게 개선해주길 바란다.”(<한겨레> 3월7일치)
나는 내심 그의 격려가 고마웠다. 문 목사는 앞서 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때 ‘양김’으로 갈라졌던 민주세력 중에서 김대중씨를 지지한 재야의 대표 지도자였다. 그런 문 목사가 김영삼 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고 새 정부가 추진하는 통일정책이 실패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의 외침은 곧 나의 소망이요 외침이기도 했다. 새 부대가 아닌 헌 부대에 새 술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지 깊이 염려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말에 공감한 것이다. 공안세력·냉전세력이라는 헌 부대에 과연 열린 통일정책이라는 새 술을 담아낼 수 있을지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어 3월10일 오전 나는 통일원 장관으로서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통일관계장관회의를 주재했다. 서울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외무·내무·재무 등 17개 부처 장관들이 참석했다. 현안은 당연히 북한 핵사찰 문제와 이인모씨 북송 문제였다. 북의 핵 개발 추진으로 한반도에서 핵 불균형이 생길 수 있다고 염려하는 이야기가 오갔고, 북한 당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사찰을 수용하도록 합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데 각료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이때까지 미국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투자나 원조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남북이 진행해온 직교역, 특히 임가공 교역은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남한은 북한의 4대 교역국이었다.
관계장관회의에서 나는 이 점을 상기시키고 경제인의 방북을 융통성 있게 허용하는 방안에도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씨 북송 문제에 대해서는 자세한 토의를 하지 않았다. 대신 통일관계장관 전략회의를 구성해 논의한 뒤 차후에 대책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실 이때는 이미 김영삼 대통령 특유의 ‘깜짝 발표’로 비상사태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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