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15일 오후 열린 국회 상임위 외교통일위원회에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서 처음 출석한 필자(왼쪽)가 송영대 차관과 답변을 논의하고 있다. 이인모씨 북송 허용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을 둘러싸고 여당 의원들이 정부를 공격하고 야당 쪽에서 지지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2
1993년 3월15일은 통일원의 청와대 첫 업무보고와 국회 상임위원회(외무통일위) 첫 출석으로 취임 이래 가장 분주한 날이었다. 오전 청와대에 도착해 국무회의실로 가는 복도에서 대통령에게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청와대 들어오신 지 2주일이 넘었는데 어떠신지요? 좀 답답하시지요?” “아, 감옥처럼 답답하구만….” 특유의 솔직하고 담백한 대답이었다.
통일원의 업무보고는 30분 이내에 부드럽고 간결하게 끝냈다. 이어 대통령은 이인모씨 북송에 대해 “16일 판문점에서 열린 연락관 회담이 잘되면 16일 오후에라도 즉각 보낼 수 있도록 하라. … 이것이 인도주의 원칙에 맞는 것이고 남북한 신뢰회복 차원에서도 옳은 조치”라고 말했다.
북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의 충격 속에서도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대북정책의 타당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은 착실히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본격적인 남북 경제협력도 북핵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라고 했다. 이로써 핵문제는 인도주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은 수구세력의 영향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듯했다.
이날 오후 국무위원으로서 첫 국회 상임위 출석을 앞두고 서둘러 통일원으로 돌아온 나는 질문공세에 대비하려 했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마치 훈련도 안 받은 채 곧바로 전투현장에 투입되는 군인처럼 무거운 긴장감이 짓눌렀다.
이윽고 의원들의 질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여당 의원들은 비장할 정도로 비우호적인 표정이었고 야당 의원들은 느긋하고 다소 우호적이었다. 안기부장을 지낸 안무혁 의원과 통일원 장관 출신의 이세기 의원은 잔뜩 벼르고 있는 듯했고, 반대로 야당의 이우정·남궁진·조순승 의원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첫 질의자로 나선 안 의원은 “북핵 문제가 심각한데 이인모씨를 조건 없이 북송하는 것은 상호주의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다. … 지난 2월 말 부총리의 <한국방송> 인터뷰 내용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사견이 아닌가”라고 포문을 열었다.
나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그렇게 빨리 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하고, “꾸짖으시면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 그 충고를 받아들이겠다”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씨 북송에 대해서는 새 정부의 인도주의적 특례 조치라고 밝히고, 인도주의는 조건을 붙이는 상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어 야당의 조 의원이 여당 쪽을 비판했다. “이인모씨 북송은 우리 당 차원에서 전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지금 한 장관이 말하듯이 인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잘한 조처다. 이를 통해 남북간의 문제가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풀린다면 이는 일보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자 이세기 의원이 ‘이씨 북송 결정 시기가 적절했느냐, 이씨 북송이 북한 개방보다 김일성의 통치 논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오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이는 냉전론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논리였다.
이번에는 야당의 이우정 의원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이인모 노인이 폐암으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이 때문에 이북에서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 이북에서 조금 이용하더라도 국제적으로…, 우리가 받는 국제적인 손상을 따졌을 때 통일원의 북송 허용은 잘됐다 생각합니다. 결정할 때 유엔 제소나 국제 여론도 다 참고됐습니까?”
여야가 뒤바뀐 듯한 이 진풍경은 민주주의 성장의 신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새 정부 안에 버티고 있는 냉전수구세력의 강고한 힘을 확인하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상임위에서 좀더 용기있게 소신을 펼치지 못하고 보수적 의원들의 질의에 겸손하게 대응한 것이 아쉽고 부끄럽다. 따지고 보면 북한 체제를 강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인도주의적 정책이나 평화지향적 접근이 아니라 증오에 찬 냉전적 강경책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혀야 했다. 실제로 그해 6월 미디어리서치가 진행한 여론조사를 보면 일반인 79%가 이씨 송환에 찬성했다. 반대는 8%에 불과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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