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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하나님 자녀’ 찬사에 표정 풀린 케냐 대통령 / 한완상

등록 2012-08-28 19:39수정 2012-08-31 22:53

1994년 5월15일 필자를 비롯한 대통령 특사 일행은 케냐의 대니얼 모이 대통령을 만나 아프리카 4개국 순방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년 넘게 케냐를 철권통치한 모이 대통령은 당시 바쁜 일정을 이유로 면담 약속을 취소하려다 일요일 오후 마지못해 만나주기도 했다.
1994년 5월15일 필자를 비롯한 대통령 특사 일행은 케냐의 대니얼 모이 대통령을 만나 아프리카 4개국 순방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년 넘게 케냐를 철권통치한 모이 대통령은 당시 바쁜 일정을 이유로 면담 약속을 취소하려다 일요일 오후 마지못해 만나주기도 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8
1994년 5월12일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한 나는 호텔에 여장을 풀자 곧 서울로 전화를 했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면서 어머님께서 소천한 날이었다. 해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날이다.

그 어지러웠던 80년 ‘서울의 봄’ 한가운데서 어머님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여러 민주인사들과 동지들이 문상을 와주었다. 그런데 그 며칠 뒤 나는 김대중·문익환·예춘호·이문영 선생 등과 함께 신군부에 의해 ‘일망타진’을 당했다. 바로 내 어머니 상가에 모여서 ‘내란음모’를 했다는 이유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감동적인 새 정치 현장을 확인해서인지, 야만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이 새삼 쓰렸다.

5월13일 오전 8시30분 대니얼 모이 대통령과 면담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돌연 약속 취소 통보가 왔다. 마침 이웃나라의 정상 세 분이 방문하는 바람에 한국 특사를 접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공식 방문이 예정됐던 콩고 대통령과 함께 다른 두 나라 정상이 만델라 대통령 취임식에 왔다가 예고 없이 들렀다고 했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외교결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이날 오전 9시30분 외무장관 집무실을 찾아갔다. 40대의 젊은 장관은 자신이 대통령을 대신해 한국 특사의 얘기를 듣겠다며 친서 내용을 물었다. 속으로 몹시 불쾌했지만 나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틀 더 머무는 동안 잠깐이라도 대통령과 접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냥 나와버렸다.

나는 어떻게든 뜻을 관철하고 또 불쾌함을 케냐 외무부에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권순대 한국대사를 통해 외무부의 오찬 초대에 내가 불참해도 좋은지 묻도록 했다. 허락될 리가 없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오찬장으로 갔다. 일본 대사를 비롯해 경제부처 사람들이 여럿 와 있었다. 초청자인 외무부 차관보는 내게 각별히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가 3명의 아내와 19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자랑을 하기에 나는 세 아내 사이의 갈등 문제, 자녀의 교육과 반항 문제 등을 가볍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차관보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음에 또 방문하면 가장 젊은 아내가 있는 농장으로 특별히 초청하겠단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불쾌했던 감정을 삭이고자 했다. 다시 한번 정중하게 모이 대통령과 면담을 요청하자 그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그날 오후, 오는 일요일 오후 5시께 잠깐 모이 대통령을 접견할 수 있다는 전갈이 왔다. 대단한 배려를 한 셈이었다. 그래서 주말 이틀 동안 이웃 탄자니아의 박부열 대사에게 연락해서 마사이족이 사는 거대한 초원분지인 ‘응고롱고로 분화구’로 여행을 다녀왔다.

마침내 일요일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린 뒤에야 4선째 장기집권중인 칠순의 거구, 모이 대통령이 나타났다. 나는 수단과 소말리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헌신하는 모이 대통령의 외교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껏 띄워준 다음 크리스천이라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역분쟁의 해결을 위한 각하의 평화외교 노력이 혹시 ‘마태복음’ 5장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평화를 이룩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모이는 갑자기 부드러운 어투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그의 정치와 정책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야고보서’와 사도 바울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평화와 정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길게, 힘있게 설명했다. 이에 우리 김영삼 대통령도 ‘기독교 장로’이고, 나 역시 크리스천이라고 했더니, 그는 더욱 기뻐하며 표정이 풀어졌다. “일요일인 오늘 교회에 가지 못했는데 마침 대통령 각하의 은혜로운 설교를 듣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이렇게 좋은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처음의 그 어색하고 딱딱했던 분위기는 따뜻하고 친절한 분위기로 반전되었다. 대통령도, 외무장관도, 우리도 모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이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장 좋은 친구에게 나의 가장 따뜻한 문안을 전해주시오”라며 김 대통령에게 보내는 인사를 당부했다.

밖으로 나오니 여러 방송 카메라맨과 기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밤 호텔에서 톱뉴스로 나오는 우리의 방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로소 아프리카 4개국 특사 순방을 무사히 마쳤다는 실감이 났다. 배상길 심의관은 감격에 겨워 “특사님, 미숑 아콩플리입니다”(임무 완수!)라고 치하해주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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