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28일 필자는 종합유선방송위원장에서 물러나 한국방송통신대 2대 총장으로 취임해 오랜만에 박사모를 다시 써보며 감회에 젖었다. 사진은 이듬해 2월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이다. 사진 방송대신문사 제공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84)
1994년 9월4일 일요일 아침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방송대 총장으로 간다는 보고를 들었는지 다음 종합유선방송위원장으로 누가 적임자인지를 물으셨다. 나는 어제 유혁인씨와 함께 점심을 하면서 그가 위원장으로 오고 싶어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한때 박정희 권위주의시대 한국 정계를 주름잡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내가 서울대에서 추방될 때 그는 막강한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김 대통령에게 그를 내 후임으로 추천했다. 김 대통령도 그의 인간성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성을 빗대어 ‘부드러운 버드나무 같다’는 평을 들을 만큼 그의 성품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휴일 아침 김 대통령이 직접 전화까지 한 진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국사회연구소에서 이틀 뒤 차세대 지도자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열 예정이었다. 물론 차세대 지도자에는 김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그는 사전 여론조사에서 여섯번째 지도자로 뽑혔다. 현직 대통령은 으레 차기 지도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이 여론조사 결과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여론에 너무 민감하다. 특히 보수적인 여론에 민감하다. 나는 여러 차례 여론보다 무서운 것은 역사의 평가라고 조언했지만 여전히….
9월27일 서울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주최로 국제회의가 열렸다. 지난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특사로 방문했을 때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에게 이 회의의 주제강사로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전했으나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무산됐다. 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특별강사로 모시려던 계획도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내가 ‘대타’처럼 주제강연을 하게 됐다. 나는 ‘민주주의와 관용의 가치’를 제목으로, 오늘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지 못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은 바로 분단을 합리화하고 강화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임을 지적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런 적대적 공생 관계를 파격적으로 극복해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바로 다음날인 9월28일 나는 7개월 만에 종합유선방송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송대 교수들의 투표에서 후보로 뽑힌 나에 대한 총장 임명안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이날 오전 이임식을 한 뒤 오후 2시 방송대로 옮겼다.
두 가지 감회가 나를 사로잡았다. 하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이었다. 지금과 달리 이때는 국무위원이나 국회의원이 되면 원래 몸담았던 대학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는 이 땅의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독특한 대학에 기여할 수 있게 됐다는 뿌듯함이었다. 서울대가 엘리트의 대학이라면 방송대는 바로 민중의 대학이다. 그런데 이제 정보화 흐름이 세계를 주도하게 되면, 방송대가 새 시대를 선도하는 첨단대학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총장실 의자에 앉고 보니 “좀더 일찍 앉았어야 할 자리로구나” 하는 감회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틀 뒤 총장 취임식에서 30년 만에 박사 가운을 다시 입어 보았다. 서울대 교수 시절 내내 졸업식은 늘 어수선해서 한 번도 가운을 입고 졸업식에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취임사에서 방송대를 위한 세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첫째는 열린 대학으로 우뚝 서자고 했다. 배타적인 엘리트 대학과 달리 모든 사람에게 학습 기회를 활짝 열어주는, 기회의 민주대학 구실을 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는 첨단대학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새로운 멀티미디어시대를 선도하는 대학, 정보화시대를 앞에서 이끌자고 했다. 셋째로 분단을 극복하는 민족대학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방송대만이 전 국토를 교정으로 활용할 수 있고, 온 국민을 학생으로 모실 수 있고, 온 가정을 교실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대학이라는 확신을 나는 갖고 있었다. 이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영미 교수(메조소프라노)가 ‘그리운 금강산’을 축가로 불러줬다. 평화롭게 하나 되는 민족의 앞날을 향해 성실하게 달려가도록 독려하는 노랫가락과 노랫말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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