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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YS, 레이니 대사에 “성조기 달지 말고 오라” / 한완상

등록 2012-10-11 19:35

1997년 1월24일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의 이임 환송모임에서 대사 부부와 필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3년 전 대사 부임 초기 청와대가 레이니에게 심각한 외교 결례를 했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고 놀랐다.
1997년 1월24일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의 이임 환송모임에서 대사 부부와 필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3년 전 대사 부임 초기 청와대가 레이니에게 심각한 외교 결례를 했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고 놀랐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08
1997년 1월21일 오후 3시, 지난 연말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의를 내고 이달말 임기를 마치는 레이니 박사가 나를 처음으로 집무실로 초청했다. 공사인 리처드 크리스텐슨도 함께 1시간 가까이 환담을 했다.

전라도 사투리까지 잘하는 크리스텐슨 공사와는 레이니 대사 부임 이전, 재야 시절부터 여러번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옛날 주한 미대사의 막강한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회고했다. 80년 ‘서울의 봄’과 이후 급박했던 5·6·7월에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대사의 우유부단함과 존 위컴 8군사령관의 망언(“한국인의 들쥐 같은 성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미국 대사의 영향력이 조금씩 약화되고 있는 것은 한국인들의 민주 역량이 그만큼 커진 반증이 아닐까.

레이니의 후임으로 누가 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나는 ‘군림하는 총독형’이 아니라 그레그나 레이니처럼 ‘이웃 친구형’ 대사가 오기를 바랐다. 앞으로 미국이 한국에 대해 군사·정치적 영향력을 조금씩 줄이면서도 경제적 영향력, 즉 시장개방 압력만은 더욱 가중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월24일 오후 레이니 대사의 환송식이 있었다. 그를 아끼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 주로 열린 신학과 신앙으로 살아오신 분들이 주선한 송별모임이었다. 93년 11월 레이니 대사의 부임 환영 모임을 주선하고도 김영삼 대통령의 만류로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그를 위해 감회 어린 환송사를 했다.

내가 짤막한 환송의 변을 마치자 레이니는 고맙다는 인사에 이어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낮은 목소리여서 나만 들을 수 있었다. 3년 전 그의 환영식에 부총리인 나를 참석하지 못하도록 청와대가 압력을 넣은 것은 미국을 의도적으로 격하시키려는 김 대통령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의 거의 모든 분야의 거물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환영식에 나 같은 사람 하나 가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의 격이 낮아진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그 순간 나는 레이니의 판단이 조금 과민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가 좀더 조용한 목소리로 털어놓은 다음 얘기는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부임 초기 북한에 대한 미국 정부의 포용적 대응을 못마땅해한 김 대통령을 설득하고자 청와대에 가기로 했는데, 그때 비서실에서 대사의 전용차에 성조기를 달지 말고 들어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레이니는 그때 불쾌했던 경험을 3년이나 혼자 참고 있었던 것이다. 성조기는 미국의 국기요, 대사는 미국 대통령을 대신하는 직분인데, 그런 요구는 외교관례에 비춰 있을 수 없는 무례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이 정말 미국을 길들이겠다는 치기라도 부렸던 것일까, 아니면 미국 대사의 잦은 청와대 출입을 보고 국민들이 혹여 오해할까 염려했을까, 여하튼 상식과 양식 밖의 일이라 나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레이니의 불편한 심기를 나는 충분히 역지사지할 수 있었다. 심각하고도 어이없는 실수다.

1월27일 오전 9시30분께 오인환 공보처 장관이 전화를 했다. 오늘치 <한겨레신문>에 실린 ‘시평-즉물정치와 넥타이의 반발’에서 내가 ‘정치 치매’란 표현까지 써가며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으로 보여 놀랐다고 했다. 오 장관은 김 대통령을 취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좌해온 문민정부 최장수 각료였지만, 적어도 냉전수구 노릇은 하지 않았다. 그도 내 논리의 잘못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문민정부가 지금처럼 계속 나간다면 모두가 ‘역사의 하수구’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그가 청와대 지시에 따라 전화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 얘기를 경청했다. 그가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인가, 나는 5개월 남짓 매주 한 차례씩 그 신문에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도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편지 쓰는 형식으로 고언을 쏟아냈기에 이번 내 글을 보고 그가 새삼 놀랄 턱은 없었다. 다만, 그도 김 대통령을 모시는 처지이니 다소 곤혹스러웠을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이튿날 저녁 미대사관저에서 열린 레이니 대사의 환송 리셉션에 갔더니 600명 가까운 정치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회창 전 총리도 내 칼럼을 읽었다며 인사를 했고, 한 방송사의 사장과 호남 출신 한 여당 의원은 잘 썼다며 격려해주었다. 나는 여러 정치인들의 유사한 인사를 받고 보니 오히려 불편해져서 서둘러 관저를 빠져나왔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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