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7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씨와 함께 국제인권센터에서 주는 인권상을 받기 위해 시상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필자는 그즈음 국정원 수뇌부를 통해 김 대통령에게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제언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21
1998년 5월13일 이종찬 국가정보원장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나는 마셜플랜 같은 큰 계획을 세워 북한을 돕는다면 결국 우리 스스로를 돕는 일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남과 북에서 냉전강경세력이 약화되어야만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고 말했다. 또 남쪽 냉전강경세력의 뿌리가 친일세력임을 상기시켰다. 따라서 그 세력의 척결 없이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의 개혁은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내 의견에 모두 쉽게 동의해주었다. 너무 싱겁다. 좋은 인품 덕분인지, 쓰라린 인생 경험의 지혜인지, 아니면 신념인지 짐작이 잘 안 간다. 심중을 헤아리기 힘든 사람이다.
5월30일 북한 옥수수심기 운동에 동참하고자 방송대 총학생회에서 큰 노래잔치를 벌였다. 약 4000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이런 노력 덕분에 북한 어린이들이 조금이라도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다음날 오후 골프장에서 우연히 소석 이철승 전 의원을 만났다. ‘반공’을 내세운 여러 보수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그는 나를 보자 잔잔히 웃으며 “그간 고통 많이 받았지요”라고 말했다. “소석이 그간 저를 많이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하고 나도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친절하면서도 어딘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즐겨온 냉전강경세력들이 만약 한반도에 우호적 공생관계의 시대가 온다 해도 즐거워할까. 그때도 소석의 얼굴에서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6월2일 김덕 전 안기부장과 조지아대학의 박한식 박사를 초청해 점심을 함께 했다. 박 교수는 북한의 붕괴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군부가 권력을 완전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 군부가 힘을 갖고 있기에 남북간 적대적 공생관계가 강화될 수도 있지만, 힘이 있기에 남쪽과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박 교수는 디제이가 이런 점을 참고해서 현명하게 대화 국면을 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김 전 부장은 중국 관료들 중에 북의 임박한 붕괴를 예견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북을 제대로 아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라고 대응했다.
6월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국정원의 라종일 차장을 만났다. 박 교수도 나와 있었다. 6일로 예정된 김 대통령의 취임 첫 미국 방문을 앞두고 남북관계 개선 방안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교환했다.
무엇보다 우리 남한에 북한을 흡수통일할 힘이 없다는 데 라 차장과 내 생각이 일치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처리도 제대로 못하는 형편에 북한 체제의 붕괴를 우리가 관리해낼 수 있겠는가 물었다. 박 교수도 “북이 붕괴하지 않도록 우리 쪽에서 현명한 정책을 써야 한다”고 했다. 옳은 판단이다. 박 교수는 남북간 깊은 냉전의 불신을 제거하려면, 우리 대통령의 평화 의지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라 차장은 이번 방미 때 김 대통령이 미국 정부의 북한에 대한 무역금지조처 해제를 요구할 것이라며 혹여 북한 당국이 봉쇄 해제를 했을 때 “제국주의자들이 북에 무릎을 꿇었다”는 식으로 선전방송에 이용하지 않을지, 반대로 미국 정부가 보수세력의 비판을 너무 의식해서 해체 자체를 거절하지 않을지 염려된다고 했다.
나는 김 대통령께서 매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그것이 훗날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를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 차장에게도 그 자리에 있는 한 대통령을 ‘역사적 시각에서 보필해야 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박 교수는 오는 8월 조지아대학 자신의 연구소에서 남북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려고 한다며 강원룡 목사 등 통일문제 고문 몇 분과 함께 나를 초청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라 차장은 내가 그 세미나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아마도 나의 적극적인 대북정책이 조심스럽게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는 김 대통령에게 짐이 된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와이에스 때처럼 내가 대북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할까봐 지레 겁을 먹는 것 같기도 하다. 대통령을 안전하게 모시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고 나는 이해했다.
여하튼 이번 방미에서 김 대통령이 용기 있는 한반도 평화 구상으로 미국 정부를 설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행하는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정치의 욕망’ 대신 ‘역사의 욕망’을 권고해줘야 할 텐데….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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