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8월29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맨 오른쪽)과 누나이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당시 호암미술관장(가운데)이 북한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고 있다. 그 무렵 북한 민화협의 초청을 받은 필자도 앞서 8월21일 이들 일행과 같은 비행기편으로 베이징에 갔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24
1998년 8월12일 오전 10시 무렵 통일부의 황아무개 국장이 전화로 모레 오전에 방북을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지난달 26일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김영호 회장의 이름으로 초청장을 받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인 김승균 사장(일월서각)과 함께 방북 신청을 했더니 이제야 답이 온 것이다. 통일부의 태도가 무척 미묘하고 부정적이다. 기자들이 내가 혹시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하는 것이 아니냐고 캐물어 곤란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날 내 방북 소식을 짤막하게 보도했던 <연합통신>에서 다음날 아침 일찍 나의 방북이 무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속보가 나왔다. ‘13일 통일부에 따르면, 한 전 부총리의 방북 신청일이 22일부터 열흘 동안으로 이 기간 중 북한 김정일 총비서의 국가주석 추대 및 취임이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자칫 북한이 한 전 부총리의 개인 차원 방북을 남한 고위인사의 ‘축하 방문’으로 미화·선전할 것이 우려된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그날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햇볕정책의 원조 한완상씨 방북’이란 제목의 표현이 자칫 청와대와 통일부에서 볼 때 불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한편으론 통일부에서 나의 방북을 막으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의구심도 들었다. 나는 분명 북한 민화협 명의의 초청장을 받았는데도 통일부가 언론에 사회과학연구소 초청이라고 발표해 언론들은 그렇게 보도하기도 했다.
이날 오전 ‘김대중 선생 납치생환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더니 마침 통일부의 황 국장도 왔다. 연합통신 기사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통일부에서 정보를 흘린 게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과연 그럴까.
8월20일 아침 일찍 황 국장이 또 전화를 해서는 오늘 오전 중으로 통일부에서 방북 허가 수속을 끝내주겠다고 했다. 동행할 김 사장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내일 우리가 베이징공항에 도착하면 북한에서 나온 영접인들이 차를 대기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의아스럽고 당황스러웠다. 어차피 북한의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공항까지 나올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이번에 남북 언론교류 협력방안 협의차 초청받은 언론인 5명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인인 홍라희 호암미술관장도 함께 방북할 터여서 더 신경이 쓰였다.
이어 오전 10시20분께 안기부 대북담당 과장과 직원이 방송대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이번에 평양에 가서 리인모 노인과 김정일 비서를 만나게 되는지 물었다. 나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실제로 평양 일정은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북한 민화협에서 보낸 초청장에는 “우리는 한완상 선생이 평양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합니다. 선생이 평양을 방문하는 동안 우리측 해당 기관에서 신변안전과 무사귀환을 보장해 드릴 것입니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일종의 백지 초청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리인모 노인을 인사차 만나게 된다면 거절하기 어렵겠지만, 그 만남이 정치선전 목적이 명백하다면 사양하겠다. 다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평양 비행장에 나와 있어서 불가피하게 만날 수도 있으니 안기부에서 잘 이해해 달라.” 김 비서와의 만남 여부에 대해서는 내가 오히려 궁금해서 되묻고는, 만에 하나 만나게 된다면 김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통한 대북 제안에 대해 북쪽에서 긍정적으로 응답하도록 촉구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김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5개항의 공개 질문장을 보내왔다. 그런데 조평통 서기국은 디제이의 제안을 ‘허황성, 모순성, 기만성’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문민정부 때 못지않은 비난 강도여서 나는 놀랍고도 당황스러웠다. 특히 세번째 질문인 ‘상호주의와 햇볕론 따위를 들고 상대방을 우롱하려 들면서 진정한 협력교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가’는 디제이 정부의 독특한 대북정책인 햇볕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8월21일 오전 김 사장과 함께 베이징행 아시아나항공에 오르니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내 옆자리였다. 그는 내가 평양에서 김 비서를 만나게 되는지 은근히 물었다. 내가 전혀 모르겠다고 하자 그는 ‘만일 만나게 되면 그 면담 내용을 중앙일보에서 특종 보도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낮 12시30분께 베이징에 도착해 켐핀스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우리 방북 일행을 안내하는 조선족 ‘강 선생’이 평양에서 온 거물급 인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는 확실치 않으나 전금철 책임참사 같다고 했다. 4개월 전 남북 차관급 회담 때 북쪽 대표였던 그가 왜 베이징까지 미리 와서 나를 만나려는지 의문이 생겼다. 오후 3시 약속 장소인 자오룽호텔로 가는 내내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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