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조준호 공동대표(왼쪽)가 경기도 고양시 일산킨텍스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진보통합당 중앙위원회에서 ‘강령 개정안 심의·의결의 건’이 처리되는 순간 단상으로 뛰어든 한 당원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공격당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심층 리포트] 진보정당 15년, 위기와 기회
① 과거 - 통합과 분열
① 과거 - 통합과 분열
‘진보정당의 몰락’이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각인된 장면이 있다. 2012년 5월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다. 비례대표 후보 경선 부정이라는 당내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던 경기동부연합 중심 당권파들은 회의장을 점거하고 지도부를 폭행했다. 조준호 당시 공동대표의 머리채를 뒤에서 낚아채던 통합진보당 여성 활동가의 모습은 진보정당 전체에 폭력 이미지를 뒤집어씌웠다.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인 권영길 전 의원은 “진보정치세력 전체에 대한 살해행위”라고 비통해했다.
‘종북 논란’도 따지고 보면 당권을 둘러싼 갈등에서 나왔고, 이석기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합정동 회합’(RO) 사건에 대한 당권파들의 이해할 수 없는 ‘자기편 옹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 결과는 결국 분당과 통합진보당의 해산이었다. 통합진보당 해산은 민주주의의 시계를 되돌린 일이지만, 진보정당에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뼈아픈 기회’이기도 하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4년 뒤에 의원 10명 배출하면서
패권다툼 본격화
“파벌 다르면 밥도 따로 먹었다”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 안지켜져 ■ 독이 된 10석의 영광 해산된 통합진보당을 포함해 정의당, 노동당 등 현재 대다수 진보정당의 뿌리는 2000년 1월30일 창당한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의 모태는 19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내세웠던 ‘국민승리21’인데, 여기엔 민주노총과 평등파(민중민주계·PD)가 주축이 됐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창당 초기엔 다수파가 평등파였으나, 2001년 이후부터 전국연합·전농 등 자주파(민족해방계·NL) 가 조직적으로 합류하면서 세력 구도가 바뀌었다. 당시 적극적으로 자주파를 끌어들였던 노회찬 전 의원은 <한겨레>와 만나 “당시에는 한 노선으로는 당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정치노선을 지닌 조직을 모아 다원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엔엘·피디 대립을 감수하고서라도 미약한 세력을 한줌이라도 더 키우려 한 것이다.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는 2001년에는 1인1투표 제도를 통한 비례대표 의석 배분 위헌 결정으로 1인2표 정당명부제를 도입하도록 했다. 민주노동당을 키운 것도, 통합진보당을 없앤 것도 헌법재판소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비례 8석으로 의회에 처음 진출했다. 진보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밑돌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진보정당도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거꾸로 파벌 갈등엔 독이었다. 자주파는 지역위원장을 차지하기 위해 위장전입, 당비 대납도 서슴지 않으며 악착같이 밑바닥을 파고들었고, 평등파는 밀려났다. 당 지도부·비례대표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흑색선전, 대리투표 등의 부정이 벌어졌고, 파벌 지도부가 공직·당직 후보자 명단을 내려보내면 각 세력이 똘똘 뭉쳐 찍는 ‘정파 세팅’ 선거가 횡행했다. 양대 파벌은 소통을 포기했다. 최규엽 전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은 “파벌이 다르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더라도 같이 밥도 먹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정영태 인하대 교수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괜찮다는 건 박정희 정권의 논리인데 어느새 진보정당도 그에 젖어들었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다양성의 인정이고 그 수단은 대화와 타협인데, 진보는 민족해방, 계급해방이라는 명분과 사회적 약자라는 논리에 사로잡혀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007년 민노당-진보신당 갈라서
2012 총선 앞 ‘한지붕 세가족’
사상 최고 성적표 받았지만
경선부정 내홍으로 다시 결별
이석기 사태로 정당 강제해산까지 ■ 패권, 종북 그리고 1차 분당 ‘종북’이라는 단어는 보수정당이 처음 꺼낸 게 아니다. 통합진보당 내에서 평등파가 자주파를 공격하며 사용한 말이다. 파벌 갈등의 중심엔 북한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깔려 있었다. 특히 2006년 북한 핵실험은 북한을 보는 시각차를 분명히 나타내 갈등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자주파 최고위원들은 미국의 대북한 정책을 비판하며 북한의 자위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당시 최기영 사무부총장 등이 당의 주요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는 일심회 사건도 터지며 갈등은 곪아갔다. 민주노동당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대선 직전부터 비롯됐다. 그해 11월, 양대 파벌은 벌써 이듬해 총선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을 놓고 격돌했다. 분당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평등파는 북한을 겨냥해 “군사왕조정권”(조승수) “광신도, 사교집단”(홍세화) 같은 공개적 비난을 쏟아부었다. 심상정 비대위원장이 평등파의 탈당론을 무마하기 위해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을 내놨지만, 당의 다수를 차지했던 자주파의 반대로 부결됐다. 갈등의 골은 메워지지 못했다. 자주파는 민주노동당에 남았고 평등파 다수는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 의석을 위한 연대와 통합이 빚은 폭력사태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5석을 얻었지만, 조직력이 약하고 인지도도 낮은 진보신당은 1석도 못 얻었다. 민주노동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의 적극적인 야권 연대로 기초단체장 3석을 얻은 반면, 서울시장에 노회찬 후보를 완주시킨 진보신당은 야권 분열 세력으로 몰렸다. 독자적으론 원내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진보신당의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 의원은 2011년 9월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시도했다가 부결되자 탈당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민주노동당, 참여당계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한지붕 세가족이 된 통합진보당은 2012년 4·11 총선에서 13석을 얻으며 진보정당 사상 최고의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나 국회의원 의석을 얻기 위한 정치공학적 연대는 출발부터 삐걱댔다. 이영순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비례후보 경선 룰을 만들 당시 참여당계와 의견이 너무 달랐다. 민주노동당 10년 하면서 어떤 조건에서도 여성할당제를 지켜왔는데 참여당계는 할당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차이를 무시하고 억지로 통합하려던 게 무리였다”고 말했다. 이는 2012년 참여당계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 제기에 이어 폭력 사태, 재분당으로 이어졌다. 김정훈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은 “각자 상대방이 좀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 했던 것 같다. 원내 진출을 위한 조급증 탓에 서로의 차이가 장밋빛 낙관으로 가려졌다”고 말했다. 유시민을 중심으로 한 참여당계와 심상정·노회찬 등 옛 진보신당 세력, 인천연합은 진보정의당으로 갈라섰고, 자주파를 중심으로 한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울산경남 세력은 통합진보당에 남았다. ■ RO 사태, 종북 논란 그리고 해산 2013년 8월, 경기동부연합의 리더인 이석기 전 의원이 주도한 ‘합정동 회합’(RO) 녹취록이 공개됐다. 한반도에 곧 전쟁이 날 거라는 정세 판단, 수입 장난감 총으로라도 전쟁을 준비하자는 계획, 이에 동조하는 참석자들의 발언 등이 공개됐다. 이는 ‘북한과 대화와 협력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자주파의 공식 입장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합정동 회합에 참석했던 한 당직자는 “나중에라도 우리가 모임을 가졌던 2012년 봄에 미국이 북한에 대한 공격을 고려했었다는 물증이 나올 수 있지 않은가. 혹 전쟁이 나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대중과의 ‘인식’ 괴리를 보여준다. 통합진보당은 이후 처리 과정에서 불투명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진보 지지층으로부터도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정희 대표는 처음에는 “완전 날조”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 녹취록의 발언들이 “농담”이라고도 했다.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공안당국의 수사에 맞서 ‘단결투쟁’만을 강조할 뿐, 이석기 전 의원의 견해가 통합진보당의 공식 입장과 어떻게 다른지, 이석기 그룹이 일부만의 의견이라면 당내에서 그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이석기 그룹을 중심으로 한 합정동 회합을 내란음모로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종북 세력’이 당 지도부를 장악했다는 것을 근거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을 내린 데엔 이석기 그룹을 감싸기에 급급했던 통합진보당의 처신이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 지병근 조선대 정치학과 교수는 “진보진영 대부분은 ‘주사파’에 대한 비판이 자칫 ‘극우세력의 진보진영 탄압에 동조한다’는 비판을 받을까봐 이를 회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통합진보당은 대북관의 모순점을 스스로 끊어내지 못했다”며 “이들은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기 앞서, 진보정치 전체에 ‘민폐’를 끼친 점부터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진보정당의 위상을 보면, 지난 15년을 거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자주파의 이념 문제도 분단의 역사 속에서 잉태된 상처 중 하나다. 그런 상처들도 감당해 가면서 오랜 기득권 체제에서 버텨온 것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며 “비록 진보정당이 지금은 아주 작은 세력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점점 고통스러워지는 민생난에 대한 실사구시 정책을 만들어 계속 승부를 걸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주현 하어영 이승준 기자 edigna@hani.co.kr
4년 뒤에 의원 10명 배출하면서
패권다툼 본격화
“파벌 다르면 밥도 따로 먹었다”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 안지켜져 ■ 독이 된 10석의 영광 해산된 통합진보당을 포함해 정의당, 노동당 등 현재 대다수 진보정당의 뿌리는 2000년 1월30일 창당한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의 모태는 19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내세웠던 ‘국민승리21’인데, 여기엔 민주노총과 평등파(민중민주계·PD)가 주축이 됐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창당 초기엔 다수파가 평등파였으나, 2001년 이후부터 전국연합·전농 등 자주파(민족해방계·NL) 가 조직적으로 합류하면서 세력 구도가 바뀌었다. 당시 적극적으로 자주파를 끌어들였던 노회찬 전 의원은 <한겨레>와 만나 “당시에는 한 노선으로는 당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정치노선을 지닌 조직을 모아 다원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엔엘·피디 대립을 감수하고서라도 미약한 세력을 한줌이라도 더 키우려 한 것이다.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는 2001년에는 1인1투표 제도를 통한 비례대표 의석 배분 위헌 결정으로 1인2표 정당명부제를 도입하도록 했다. 민주노동당을 키운 것도, 통합진보당을 없앤 것도 헌법재판소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비례 8석으로 의회에 처음 진출했다. 진보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밑돌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진보정당도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거꾸로 파벌 갈등엔 독이었다. 자주파는 지역위원장을 차지하기 위해 위장전입, 당비 대납도 서슴지 않으며 악착같이 밑바닥을 파고들었고, 평등파는 밀려났다. 당 지도부·비례대표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흑색선전, 대리투표 등의 부정이 벌어졌고, 파벌 지도부가 공직·당직 후보자 명단을 내려보내면 각 세력이 똘똘 뭉쳐 찍는 ‘정파 세팅’ 선거가 횡행했다. 양대 파벌은 소통을 포기했다. 최규엽 전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은 “파벌이 다르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더라도 같이 밥도 먹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정영태 인하대 교수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괜찮다는 건 박정희 정권의 논리인데 어느새 진보정당도 그에 젖어들었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다양성의 인정이고 그 수단은 대화와 타협인데, 진보는 민족해방, 계급해방이라는 명분과 사회적 약자라는 논리에 사로잡혀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007년 민노당-진보신당 갈라서
2012 총선 앞 ‘한지붕 세가족’
사상 최고 성적표 받았지만
경선부정 내홍으로 다시 결별
이석기 사태로 정당 강제해산까지 ■ 패권, 종북 그리고 1차 분당 ‘종북’이라는 단어는 보수정당이 처음 꺼낸 게 아니다. 통합진보당 내에서 평등파가 자주파를 공격하며 사용한 말이다. 파벌 갈등의 중심엔 북한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깔려 있었다. 특히 2006년 북한 핵실험은 북한을 보는 시각차를 분명히 나타내 갈등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자주파 최고위원들은 미국의 대북한 정책을 비판하며 북한의 자위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당시 최기영 사무부총장 등이 당의 주요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는 일심회 사건도 터지며 갈등은 곪아갔다. 민주노동당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대선 직전부터 비롯됐다. 그해 11월, 양대 파벌은 벌써 이듬해 총선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을 놓고 격돌했다. 분당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평등파는 북한을 겨냥해 “군사왕조정권”(조승수) “광신도, 사교집단”(홍세화) 같은 공개적 비난을 쏟아부었다. 심상정 비대위원장이 평등파의 탈당론을 무마하기 위해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을 내놨지만, 당의 다수를 차지했던 자주파의 반대로 부결됐다. 갈등의 골은 메워지지 못했다. 자주파는 민주노동당에 남았고 평등파 다수는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 의석을 위한 연대와 통합이 빚은 폭력사태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5석을 얻었지만, 조직력이 약하고 인지도도 낮은 진보신당은 1석도 못 얻었다. 민주노동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의 적극적인 야권 연대로 기초단체장 3석을 얻은 반면, 서울시장에 노회찬 후보를 완주시킨 진보신당은 야권 분열 세력으로 몰렸다. 독자적으론 원내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진보신당의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 의원은 2011년 9월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시도했다가 부결되자 탈당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민주노동당, 참여당계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한지붕 세가족이 된 통합진보당은 2012년 4·11 총선에서 13석을 얻으며 진보정당 사상 최고의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나 국회의원 의석을 얻기 위한 정치공학적 연대는 출발부터 삐걱댔다. 이영순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비례후보 경선 룰을 만들 당시 참여당계와 의견이 너무 달랐다. 민주노동당 10년 하면서 어떤 조건에서도 여성할당제를 지켜왔는데 참여당계는 할당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차이를 무시하고 억지로 통합하려던 게 무리였다”고 말했다. 이는 2012년 참여당계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 제기에 이어 폭력 사태, 재분당으로 이어졌다. 김정훈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은 “각자 상대방이 좀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만 했던 것 같다. 원내 진출을 위한 조급증 탓에 서로의 차이가 장밋빛 낙관으로 가려졌다”고 말했다. 유시민을 중심으로 한 참여당계와 심상정·노회찬 등 옛 진보신당 세력, 인천연합은 진보정의당으로 갈라섰고, 자주파를 중심으로 한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울산경남 세력은 통합진보당에 남았다. ■ RO 사태, 종북 논란 그리고 해산 2013년 8월, 경기동부연합의 리더인 이석기 전 의원이 주도한 ‘합정동 회합’(RO) 녹취록이 공개됐다. 한반도에 곧 전쟁이 날 거라는 정세 판단, 수입 장난감 총으로라도 전쟁을 준비하자는 계획, 이에 동조하는 참석자들의 발언 등이 공개됐다. 이는 ‘북한과 대화와 협력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자주파의 공식 입장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합정동 회합에 참석했던 한 당직자는 “나중에라도 우리가 모임을 가졌던 2012년 봄에 미국이 북한에 대한 공격을 고려했었다는 물증이 나올 수 있지 않은가. 혹 전쟁이 나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대중과의 ‘인식’ 괴리를 보여준다. 통합진보당은 이후 처리 과정에서 불투명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진보 지지층으로부터도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정희 대표는 처음에는 “완전 날조”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 녹취록의 발언들이 “농담”이라고도 했다.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공안당국의 수사에 맞서 ‘단결투쟁’만을 강조할 뿐, 이석기 전 의원의 견해가 통합진보당의 공식 입장과 어떻게 다른지, 이석기 그룹이 일부만의 의견이라면 당내에서 그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이석기 그룹을 중심으로 한 합정동 회합을 내란음모로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종북 세력’이 당 지도부를 장악했다는 것을 근거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을 내린 데엔 이석기 그룹을 감싸기에 급급했던 통합진보당의 처신이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 지병근 조선대 정치학과 교수는 “진보진영 대부분은 ‘주사파’에 대한 비판이 자칫 ‘극우세력의 진보진영 탄압에 동조한다’는 비판을 받을까봐 이를 회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통합진보당은 대북관의 모순점을 스스로 끊어내지 못했다”며 “이들은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기 앞서, 진보정치 전체에 ‘민폐’를 끼친 점부터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진보정당의 위상을 보면, 지난 15년을 거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자주파의 이념 문제도 분단의 역사 속에서 잉태된 상처 중 하나다. 그런 상처들도 감당해 가면서 오랜 기득권 체제에서 버텨온 것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며 “비록 진보정당이 지금은 아주 작은 세력으로 움츠러들었지만 점점 고통스러워지는 민생난에 대한 실사구시 정책을 만들어 계속 승부를 걸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주현 하어영 이승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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