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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동장부터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 뽑자” 단박에 호응

등록 2015-03-29 19:06수정 2015-04-27 21:59

왼쪽부터 방용석 전 노동부 장관, 이해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정성헌 한국디엠제트(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왼쪽부터 방용석 전 노동부 장관, 이해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정성헌 한국디엠제트(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길을 찾아서]
민통련이 걸어온 30년 ③ 주역 4인 좌담회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이해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방용석 전 노동부 장관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8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다. 민통련은 1985년 3월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민중의 힘으로!’라는 깃발을 내걸고 엄혹한 군부독재에 맞서 일어섰다. 민통련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단체로서 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 쟁취에도 불구하고 대선 패배로 적잖은 후유증을 남겼다. 민통련 30돌을 맞아 그때의 주역들이 다시 모였다. 이들은 승리의 여정을 되짚을 때는 표정이 상기되었으나 패배의 아픔을 되씹을 때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좌담회는 지난 16일 한겨레신문사 5층 스튜디오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사회는 디지털부문 김의겸 기자가 맡았다. 동영상은 <한겨레> 인터넷(hani.co.kr)과 모바일(m.hani.co.kr)에서 볼 수 있다.

사회 민통련은 1985년 11월 본격적으로 개헌투쟁을 시작한다. 그때 구호가 ‘민주헌법 쟁취’였는데 이견은 없었나?

이해찬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쪽에서는 제헌의회 구성 등 다소 과격한 구호들이 많이 나왔다. 민통련은 아무래도 대중적인 운동을 하는 조직이고, 여러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함께했기 때문에 대중적인 슬로건으로 ‘민주헌법’을 잡아서 내부 논의를 거쳐 결정했다.

정성헌 그때 대중적 구호가 대세인 건 분명했다. 대중들에게 가장 호응을 얻은 건 “읍면동장부터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 뽑자”라는 구호였다.

이재오 그때 전두환이 재집권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게 간선제니까 우리는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를 주된 구호로 내세웠다. 그게 나중에 6월 항쟁을 할 때 학생들을 포함해 전체 구호로 통일됐다.

사회 86년 신민당 개헌 현판식을 계기로 개헌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으나 5·3 인천투쟁 이후 전두환 정권의 탄압이 본격화된다. 고생들이 많았을 텐데….

방용석 84년부터 재야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노동운동 단체는 제가 속해 있던 한국노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84년 말에서 85년 초까지 서노련, 인민노련 등 이념적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가 많이 생겼다. 그게 전부 비합법적인 비공개 단체였다. 민통련처럼 사무실 내고, 사람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한 운동과는 질이 달랐다. 그래서 5·3 때 크게 두 부류의 투쟁이 벌어진 거다. 하나는 인천시민회관을 중심으로 한 민통련이, 또 하나는 이념적 노동운동 세력이 그 동쪽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재오 5·3이 끝나고 공안정국이 형성되면서 정부가 대대적인 탄압몰이에 나섰다. 5·3에 참가했던 각 단체의 사무실이 폐쇄되고, 단체 대표들은 구속 또는 수배가 됐다. 탄압을 위해 5·3을 필요 이상으로 과대하게 홍보했다.

이해찬 많이들 구속됐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사무실이 폐쇄되니까 나갈 곳도 없었다. 그런데 제가 서점을 하면서 책을 나르던 차가 한 대 있었다. 그걸 몰고 다니면서 움직이는 사무실처럼 활용했다. 차가 있으니까 유인물 같은 것들을 나를 수 있었다. 형사들이 승용차가 없을 때였으니까 차로 움직이면 쫓아올 수가 없었다. 한번은 제 차로 같이들 저녁을 먹으러 가다가 사고가 났다. 바로 길 건너가 파출소였다. 거기서 4명이 다 잡힐 뻔했다. 하마터면 일망타진당할 위기였다.(웃음)

사회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또 민통련과 신민당이 민주대연합을 하는 계기가 된다.

이재오 그때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벌어지는 각종 민주화 시위와 운동의 거의 80~90%는 민통련이 주관했을 게다. 왜냐하면 민통련이 지역과 부문에 걸쳐서 다 함께 결합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지역과 부문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다 종합할 수 있었다. 또 그때는 토론을 참 많이 했다. 밤새도록 토론해서 결정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는 했다. 그래서 민통련에 가입해 있지 않은 단체들도 시위를 할 때는 함께 참여했다. 그러다가 6월 항쟁 무렵에는 야당도 나와서 같이하게 됐다.

이해찬 국민운동본부를 만들기 위해 야당과 회의를 많이 했다. 주로 상도동 계열은 김동영, 최형우 의원 이런 분들이 접촉선이었고, 동교동은 설훈, 한영애 의원 등이 연결고리였다. 국본을 만들 때 종교계가 정당하고는 잘 안 하려고 했다. 학생도 잘 안 붙이려고 했다. 그래서 시민단체하고 종교단체끼리만 하자고 처음에 그랬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전두환을 물리칠 만한 역량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민통련은 전두환을 물리치는 것이 중요하므로 모든 단체를 다 모으자고 해서 그 논의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특히 기독교계가 야당하고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방용석 불교에는 민불련이라고 하는 단체가 민통련에 가입돼 있었고 가톨릭에는 천사협이 민통련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는 민통련에 가입된 게 없었다. 그러니까 내부에서 상의를 하고 설득을 해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거다.

개헌 투쟁
공안정국 조성 대대적 탄압 나서
박종철 고문치사 터지자 상황 반전
당시 시위 태반은 민통련이 주관
가입 안한 단체들도 시위땐 동참

6월 항쟁
전국 동시 시위로 전경 방어망 분산
꽃달아주기운동, 전경 마음 흔들어
전두환, 최루탄 안되자 타협 모색
청와대선 군대 동원도 고민했지만
미국서 반미 우려해 반대했다고

6·29선언 이후
직선제 쟁취하니 권력게임 치달아
김수환 추기경 단일화 노력도 무산
고 조영래 변호사는 여론조사 제안
현실정치 앞서 갈라진 것 반성해야
당시 열정은 높았지만 지혜는 부족
중요한 건 양보의 마음이었는데

정성헌 개신교하고 천주교가 사선협(사회선교협의회)이라는 걸 함께했다. 돌아가신 정호경 신부님이 역할을 많이 했다. 같이해야 한다고. 사선협 소속의 개신교 간부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서 그게 밑거름이 돼 나중에 같이했다고 본다.

사회 6월 항쟁 때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해찬 87년 3·3 시위 때 저희가 터득을 한 게 있다. 가만히 보니까 전투경찰이 500명 단위로 한 부대가 움직이는 거다. 전국적으로 전경들이 4만명 정도 있었다. 부대로 말하면 80개 부대다. 그래서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시위를 하면 그 병력을 묶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 적어도 2만5천명은 지역에 묶이는 거고 옮길 수 있는 병력은 1만5천밖에 안 된다. 그러면 방어력이 약해지는 거다. 나중에 6·10 항쟁 때 한날 전국에서 동시에 들고일어났다. 그때 서울 전경들이 먼저 뚫렸다. 이유는 서울도 대학 중심으로 네 군데로 나눴다. 동쪽은 경희대·한양대, 북쪽은 고려대·성균관대, 서쪽은 연세대·홍익대, 남쪽은 중앙대·서울대가 맡았다. 이때는 학생들과도 다 연결이 돼 있을 때다. 이렇게 되니까 서울 경찰들도 또 나눠져야 했다. 1만5천명이 또 나뉘어야 하니까 그만큼 방어력이 취약해진 게다.

이재오 대학이 결합한 것도 있지만, 성직자들이 또 앞장섰다. 지역에 있는 농민단체, 노동자단체들까지 결합하면서 어느 정도의 규모 있는 운동이 가능하게 됐다.

정성헌 농민들도 85년 소몰이 시위 때 전국적으로 20여 군데에서 일어났는데, 그것도 일종의 동시다발이었다. 그런 경험의 축적에서 나온 거다.

이해찬 그런데 87년 6월18일인가? 최루탄 추방의 날 집회가 있었는데 경찰이 가진 최루탄이 바닥이 났다. 전국에서 동시에 하다 보니까 만들어 놓은 게 다 떨어졌는데, 새로 만들려 해도 최루탄을 건조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경찰 병력도 모자라고 최루탄도 없으니 그때부터 전두환이 타협책을 찾기 시작한 거다. 그래서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를 만나자고 했고, 김 총재가 청와대로 들어갔다. 저희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그 결과를 기다리면서 대책회의를 했다. 우리는 “한 번 더 하자” “분명 전두환이 사기를 치는 거니까 한 번 더 하자”고 생각하면서 논의를 한참 했다. 반면에 “자칫하면 경찰 가지고 안 되니까 군인을 동원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때 저희는 “우리가 여기서 주저앉아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80년 광주를 서울에서 재현시키면 이 정권은 무너지니까, 그걸 각오하고서라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용석 여성단체들이 나와서 전경들 가슴에 꽃 달아준 운동이 있었는데, 그게 언론에도 많이 노출됐고 전경들 마음을 많이 얻어낸 운동 중 하나였다.

이재오 그때는 넥타이 부대도 나오고 6·10 항쟁 이후 운동 양상은 상당히 대중적이었다. 6·26 시위 때는 신세계백화점에서 광화문 일대 경찰 저지선이 아예 뚫렸다. 워낙 퇴근하는 직장인들의 참여가 많았으니까. 신세계에서 시청, 광화문, 종로 일대를 지나가는 차들은 전부 경적을 울리기도 했다. 아마 진압하는 경찰들이 기가 많이 죽었을 거다.

이해찬 제가 국회의원을 하면서 알게 됐는데, 실제로 그때 청와대에서 경찰력으로는 안 되니 군대를 동원해서 막을 건지 여부를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결국 미8군 사령관이 안 된다고, 전두환을 막았다고 하더라. 반미정서가 더 심해질 거라고 우려해서 안 된다고 했다고 들었다.

(왼쪽부터) 이해찬, 방용석, 정성헌, 이재오
(왼쪽부터) 이해찬, 방용석, 정성헌, 이재오
“국민 원하는 것 파악해 후배들 운동 돕는게 우리 몫”

이재오 그때 민통련에서도 8군 사령관을 만나러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광주항쟁의 희생이 그다음 희생을 막은 거다.

사회 그래서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민통련이 이른바 ‘비판적 지지’를 결정한다.

이해찬 양김이 둘 다 나가면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고민을 하다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단일화 방법은 정책토론회를 해서 민통련 노선에 더 가까운 분을 선택적, 즉 비판적으로 지지하자고 했던 거다. 그때 사회를 이재오 의원님이 봤다. 오전에는 김대중, 오후에는 김영삼을 초청했다.

이재오 그때는 민통련에서 하는 행사의 사회는 다 내가 봤다. 하하하. 논의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전체 논의도 오래 걸렸을 뿐 아니라, 각 부문 단체에서도 논의가 오래 걸렸다.

정성헌 각 지역과 부문으로 돌아가서 내부 의논해서 다시 모여서 결론을 내자고 했는데, 그게 10월 언제쯤인가 그렇다. 그때 속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부정확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몇몇 단체는 특정인 지지로 의견이 몰렸다고 한다. 그와 거의 비슷한 숫자로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제일 많은 숫자가 ‘유보’였다. 결론을 못 내린 것이다. “좀 더 민주화 운동을 열심히 해야지 이걸 가지고 이럴 때가 아니다.” 제 생각도 그랬다. 어쨌든 특정인 지지 전략은 결국 갈라져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되고 어떻게 해서든지 단일화를 시켜야 정권교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떤 이론이라기보다 단순 소박한 신념이고 판단이었다.

이해찬 민통련이 착각한 것이, 한쪽으로 힘을 몰아주면 단일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 먹히더라. 하하. 민통련의 과실이었다.

이재오 우리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는 전반적으로 그 시대를 주도했기 때문에, 우리의 역량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고 들은 이야기인데, 전두환 쪽에서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5년제 헌법도 받아들인 건, 5년 단임 직선제를 해놓으면 야당에서는 틀림없이 둘 다 나올 테니 자기들은 노태우 한 명만 내세우면 정권을 또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이미 했다고 하더라.

방용석 답답한 것 중 하나는, 두 가지 견해가 나왔는데, 동교동 쪽에서는 사자필승론 이야기를 하더라.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할 말이 없더라. 황당했다. 그건 결국 “나는 죽어도 사퇴 안 하겠다” 그 이야기 아닌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결국 싸움은 백성이 하고 결실은 정치인이 먹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느냐. 6·29 선언이 끝나고 나니까 그다음부터 민통련이 언론에 별로 안 나오더라. 다 양김 쪽으로 가서 대서특필하지, 재야운동 단체에 힘을 실어주질 않더라.

이재오 정치인들과 협상에 들어가니까 우리가 많이 밀리더라. 우리는 민주화 쟁취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서로 잘 상의해서 다 잘될 줄 알았는데 직선제를 쟁취해놓고 나서는 권력게임으로 가니까 민통련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해찬
“정치행위 함부로 해선 안된다 느껴
차라리 진보정당으로 만들었어야”

방용석
“국민이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해서
이젠 후배들 돕는 게 우리들 몫”

정성헌
“새롭게 정치운동 펴는 후배들이
우리가 못했던것 하도록 도울 때”

이재오
“아직 민주화도 남았고 통일도 해야
민통련 정신으로 다시 만날 때 됐다”

사회 결국 대선은 민통련의 패배였다. 87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겠나?

정성헌 28년 전으로 돌아가도 긍정적인 후보 단일화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때 후보 단일화를 말하는 사람은 ‘김영삼 지지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제가 들은 이야기만 해도 “정성헌이 김영삼 쪽으로부터 돈을 받아먹어서 그런다”는 식이었다. 반대쪽에서 만들어낸 것이라 보고 그냥 웃고 말았다. 운동의 대의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현실정치 앞에서 갈라진 건 반성을 많이 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예전에도 약간은 있었지만 지역 조직이 분열돼서 지역감정이 심화된 것은 반성해야 한다. 그 이후 얼마나 힘들었고, 지금도 해소가 안 되고 있지 않나. 지금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가 그때 홍보위원장이었는데, 처음으로 여론조사 방법을 제안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비상한 방법을 강구했다가 안 된 적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님 등도 개입됐는데, 양김 후보를 한 군데 초청해서 어느 정도 후보 단일화를 강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김 추기경이 초청하면 양김 모두 본인을 지지하는 걸로 생각하고 올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어느 수도원으로 12월9일에 오기로 했는데, 우리들 계산으로는 3일이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판에 한 분이 안 온다고 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재오 우리가 이른바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 민주화에 대한 열망, 도덕성, 성실성, 열정은 높았는데 현실정치에 대한 이해는 많이 부족했다. 우리들이 민주화 투쟁으로 독재를 무너뜨렸다는 자부심은 강한데 그럴수록 현실 정치인에 대한 거부감은 높았다. 그때는 감정만 앞섰을 뿐 지혜가 부족했다. 지금 이렇게 다 겪고 옛날로 돌아간다면 이제는 잘할 것 같다. 다시 돌아간다면 진짜 밤을 새우더라도 하나로 만들어낼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양보의 마음이다. 양보와 배려. 우리들 마음속에 그런 게 있어야 한다. 옛날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들어 낸다.

이해찬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절박함만 있었을 뿐 정치적인 힘이 없었다. 그래서 제어를 못 했다. 71년 대선 때는 야당이 경선으로 결선투표까지 가서 후보를 뽑았다. 그 정도의 정당이 87년도까지 육성되지 않았던 거다. 당내에서 경선을 치를 조건이 안 돼 있는 거다. 그러니까 정당정치가 유신 때부터 시작해서 되레 후퇴한 셈이다. 아까 여론조사 이야기 했는데, 그 시절 여론조사는 시장조사에 쓰이는 거지 정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론조사를 통해서 단일화하는 발상 자체가 나올 수 없었을 때다. 경험상 한계가 있었던 거다. 지금 정도의 경험을 가지고 한다면, 여론조사가 아니더라도 ‘당의 룰’을 만들어야 했다. 당의 의결구조를 먼저 만들도록 하면 거기에는 동의를 안 할 수가 없지 않나. 민통련이 그 당 안에서 심판을 봐야 하는 거다. ‘어떤 방식으로 단일화를 할 것이냐’로 묶어놓고 그 룰에 따르게 했어야 했다.

방용석 사람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 있는 한 그걸 깨뜨리고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별로 없다.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자기 마음속에 탐욕을 가득 가지고는 상대방에게 양보하라? 전 회의적이다. 30년 전으로 돌아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 대선 패배 이후 후유증이 컸고, 지금도 치유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지금이라도 과거 민통련에 참여했던 분들이 이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나?

정성헌 지내놓고 보니 왔다 갔다는 부지런히 했는데, 제대로 일을 못 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일 하려고 했던 건데 판단을 잘 못한다든지, 사적 판단이 부딪친다든지 했던 건 반성해야 한다. 88년쯤 대전 가톨릭농민회에서 장기표·김근태와 셋이 만나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반성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새로운 운동이 힘 있게 안 될 거다. 우리가 통일을 이루고 정말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만들려면 4년에 한번 바꾸는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힘들다고 본다. 좋은 헌법을 잘 만들어서 통일된 새로운 문명국가가 나오도록 봉사하는 구실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재오 지난날은 지난날이라고 치고, 아직 민주화도 남았고 통일도 해야 한다. 지난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반성하고 생각하는 건 필요하지만,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새로운 나라 안팎의 과제에 다시 우리가 예전 민통련 정신으로 만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십구비(五十九非)라는 말이 있었다. 60살이 되고 보니 59살까지 다 잘못됐다는 말이다. 60부터 다시 새로이 산다는 말이다. 사람은 변화하고 진보한다. 우리도 지난 것은 역사의 기록에 맡기지만, 지난 것은 지난 것대로 잊어버리고 남은 역사적 과제를 두고 다시 민통련 정신으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다시 마음을 추슬러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이해찬 민통련은 정당은 아니었다. 정당이 아닌 시민단체가 정치적인 행위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경험 아닐까. 대선 뒤 민통련이 여러 군데로 갈라졌다. 노동 현장으로, 언론으로, 정당으로 가고 각자를 존중해주자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차라리 민통련 자체를 진보적 정당으로 만들어서 정치력을 행사하는 게 맞았다. 그때는 독자적인 힘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건 독자적인 정치적 힘이 있어야 영향을 미치는 거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님이 저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평민당으로는 못 간다. 민주당으로 가야 거기서 당선이 되고 그래야 정치적으로 발언권이 있다.” 결국 그 양반은 대통령까지 하고 저는 총리까지 했으니 개인적으로는 잘됐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좋은 당’은 못 만들어 놨다. 벌써 30년 가까이 돼가는데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수준밖에 못 만들었잖나. 그런데 그때 민통련의 역량을 활용했으면 좋은 정당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보다 훨씬 좋은 당을 만들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양김 세력을 흡수할 수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각 당의 지도부가 돼 있지만 사실 민통련같이 헌신성 있는 당은 아니다. 통일에 관한 훨씬 더 적극적인 의제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때 ‘통일’이라는 말을 민통련만 썼지 않았나. 그리고 민주화하고 통일은 하나라고 했다. 민통련은 양당보다 훨씬 더 지적 수준이 높았다.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역량도 있었다. 그게 안 이뤄지니까 노동 부분만 가지고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졌는데, 대중정당으로서는 실패한 것 아닌가.

방용석 6·29 선언 안에 노동문제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6월 항쟁에 사무직 노동자들, 택시 노동자들 혹은 개별 노동자들의 활약이 있었다. 결국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분출됐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이 노동문제에 관해서 애정을 가지고 접근한 부분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민노당이 만들어진 거다. 정성헌 이사장과 이재오 의원하고 저 모두 45년생 동갑내기다. 얼마만큼 정치생활을 더 하실지는 잘 모르지만 국회의원들 안에서 아마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속해 있을 거다. 민통련의 주도 세대는 이제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활동을 하기에는 때가 많이 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 결국 새롭게 정치운동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우리들이 할 수 없었던 것, 하지 못해서 후회스러웠던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또 국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해서 새로운 운동방식을 모색할 때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이 민통련 선배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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