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2월 총독부의 전시교육임시조치령에 따라 이화여전은 기존 교육과정을 모두 폐쇄하고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소로 바뀌었다. 이화여전을 2년 만에 강제 졸업한 이희호는 1944년 4월 충남 예산의 삽교공립보통학교에 설치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부임해 농촌여성 계몽활동을 했다. 사진 맨 앞줄 오른쪽 둘째가 이희호.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평전] ④ 제1부 학업시대
3회 이화여전의 시련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이화여전 1학년 마칠 즈음
“동생들도 많고 하니…” 아버지 말에
스스로 학비·생활비 마련해 조달
결혼하라는 아버지 권유도 뿌리치고
어머니와의 ‘공부하겠다’ 약속 지켜
황국신민 교육 받으며 2년만에 졸업
“자괴감 느꼈지만 그만두긴 싫었죠”
삽교 내려가 계몽활동하며 지내다
해방 소식에 애국가 부르며 거리 행진
1940년 이화고녀를 졸업한 이희호(뒷줄 왼쪽 둘째)는 어머니 간병과 죽음, 아버지의 재혼 등 순탄치 않은 가족사를 겪느라 2년 뒤에야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사진은 서산에서 서울을 오가며 이화여전 입학 준비를 하던 1941~42년 무렵으로, 아버지(맨 오른쪽)와 함께한 모습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41년 서울로 올라온 이희호는 큰오빠(이강호) 집에 기거하며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경성고등상업학교를 나와 상업은행에 들어간 큰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 서둘러 결혼했다. 이듬해 봄 이희호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전) 문과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6학년을 두 번 다닌데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의 공백이 생긴 터라 한참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가 바라던 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집안의 분위기가 딸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산의 집에 내려간 이희호는 큰오빠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계집애를 전문학교 공부시켜서 뭐하시려고….” 편지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계집애’란 표현이 모멸감을 자극했다. 큰오빠가 동생을 아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시절 형제 많은 집안에서 여자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희호는 ‘공부도 계속하고 유학도 가겠다’는 결심을 더 단단히 굳혔다.
1학년 2학기를 마칠 즈음 아버지는 이희호에게 작정한 듯 말했다. “동생들도 많고 하니 학교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 ‘아버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반대한다면 스스로 벌어서 학교에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이희호는 기숙사에서 나와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종로 명륜동에 있는 정읍 사람의 집이었다. 그 집 초등학생 딸을 가르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어렵지 않고 적성에 잘 맞았어요.” 그 후로도 이희호는 할 수 있는 한 집에 손을 벌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공부했다. 생활은 팍팍했지만 집에서 독립해 뜻대로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화여전 시절 한때 아버지는 큰딸을 결혼시키려고 혼담을 서둘렀다. 상대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이희호는 아버지의 뜻에 완강하게 맞섰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결혼하지 않고 계속 공부하겠다’고 약속했던 딸이었다. 아버지는 딸을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했으나 하도 단호하게 뿌리치자 결국 포기했다. 아버지는 그 후 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화여전 학생 이희호는 학과 공부로 바쁜 중에도 좋아하던 연극을 계속했다. 그 시절 무대에 올린 작품 중에는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어리석은 아내들>도 있었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화감독 슈트로하임이 대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였는데, 그 영화 내용을 연극 무대로 옮긴 것이었다. 남녀관계의 심리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슈트로하임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이었다.
시국이 흉흉했다. 이희호에게 바늘구멍만 한 낭만의 여유를 허락하던 학창 시절도 곧 끝나고 말았다. 이희호가 이화여전을 다니던 시기는 일제 군국주의의 광기가 최후를 향해 돌진하던 때였다. 1940년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식민지 조선에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성을 갈아야 한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치욕이었다. 그해 11월 일제는 미국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세계대전을 전 지구 차원으로 확대하였다. 일제는 식민지의 인력과 자원을 있는 대로 끌어내 태평양전쟁의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징용, 징병, 학병 그리고 정신대로 조선의 젊은 남녀들을 끌고 갔다. 조선의 혼과 말에 대한 탄압도 극심해졌다.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을 내려 조선어 교육과정을 아예 없애버렸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면 불온분자로, ‘불령선인’으로 찍혔다.
마침내 총독부는 1943년 말 ‘전시교육임시조치령’을 내렸다. 이 조처에 따라 이화여전은 그해 12월로 기존 교육과정을 모두 중단하고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뀌었다. 이때 학생의 과반수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재학생은 이듬해 1월부터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황국신민 교육을 받았다. 3개월의 지도원 양성 훈련은 날마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4월 강제 졸업을 했다. 그 졸업생 중에 이희호도 끼여 있었다. 4년제 대학을 사실상 2년 만에 마친 꼴이었다.
이희호는 친구와 함께 인사하러 김활란을 찾아갔다. 학교를 떠나는 마당에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 스승에게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김활란은 1939년부터 이화여전 교장으로 있었다. 일제는 기독교 학교인 이화여전을 무슨 핑계를 붙여서든 폐교시키려고 했다. 이화를 지키는 것이 목숨만큼이나 중요했던 김활란은 친일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 오욕도 감수했다. 그런 사정을 아는 까닭에 학생들은 여전히 김활란에 대한 신망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때 김활란 박사가 ‘백인백승’(百忍百勝)이라는 글씨를 붓으로 써서 주셨어요. 백번 참으면 백번 승리하리라는 뜻이었지요. 이 말 속에 말 못할 고뇌가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자 박사로, 이화여전 시절 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이희호에게 스승을 넘어 여성 지도자로서 삶의 지표였다. 사진은 1939년 4월 일제의 서양인 교장 교체 압력에 따라 선교사 아펜젤러(왼쪽)의 뒤를 이어 이화여전 7대 교장을 맡은 김활란(오른쪽)의 취임식. 사진 이화여대 제공
김활란은 이희호의 이화여전 스승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막 세상을 알아가던 시절의 이희호에게 삶의 좌표가 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스승이 일제의 압박 아래 황국신민 교육과 군국주의 시책을 선전하는 활동을 하는 걸 제자들은 지켜보았다. 일제가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하자 김활란은 <매일신보>(1943년 8월7일치)에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틀어 바쳐 성은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보일 기회가 드디어 왔다”고 썼다.
또 이화여전을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꾸는 조처가 내려진 1943년 12월에는 <매일신보>에 이렇게 썼다.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김활란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뀌자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고, 남은 학생들도 마지못해 학업을 계속했다. 나중에 김활란은 자서전에서 그 시절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때까지 이화를 지켜보겠다고 버둥거리며 남아 있다가 이러한 일마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의 처사를 거의 후회하기까지 했다.”
이희호가 기억하는 김활란은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철없는 학생들이 김활란의 서툰 일본어를 들으며 히죽거리기도 했다. “영어를 그렇게 잘했던 사람인데, 마음에서 우러난 친일파였다면 일본어를 영어처럼 유창하게 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 점을 생각하면 김활란을 자발적 친일파와 똑같이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에 자진 협력하여 영달을 하고 재산을 불리고 동족을 괴롭힌 사람들을 단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김활란을 그런 부류의 친일파와 함께 묶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승만 박사의 가장 큰 잘못이 친일파를 불러들여 자신의 취약한 정치기반을 다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일파를 단죄하기는커녕 오히려 중용한 것 때문에 대한민국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고 불의가 득세하게 됐습니다.” ‘친일파의 죄를 물어야 한다. 동시에 그 시대의 어둠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친일 문제를 보는 이희호의 태도다. 그러나 이희호는 김활란이 5·16 쿠데타 직후 미국 정부에 쿠데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한 데 대해서는 딱 잘라 비판했다.
이희호는 자신의 일제 말기 선택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스무 살이 넘는 성인이었지만 전혀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 과정을 마쳤어요. 학업을 중단하고 싶지 않았고, 또 학교를 그만두면 서산의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희호는 농촌계몽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그 과정을 견뎠다. 그런 선택 때문에 훗날 남편에게서 “당신은 친일파요”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성숙한 이희호를 만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 한다. 스물두 살 이희호의 마음은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강제 졸업을 당한 이희호는 1944년 4월 충남 예산의 삽교공립보통학교에 부설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갔다. 서산의 집에서 가까워 그곳에 배정된 것이었다. 15살에서 20살 사이 교육받지 못한 여자 청소년들을 월요일·수요일·금요일 오전에 가르쳤다. 다른 날에는 출타중인 남자 교사들을 대신해 국민학교 상급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오후에는 학생들과 함께 논밭에서 김을 매고 풀을 베었다. 그 시절에 젊은 남자들이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갔으므로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했다. 국민학교 상급반만 돼도 노역에 동원돼 교실에서 공부하는 날보다 들과 산으로 나가 일하는 날이 많았다.
이희호는 지도원 양성 훈련 중에 마음먹었던 대로 농촌계몽운동을 한다는 자세로 현실에 적응했다. 농촌계몽은 그 시절 뜻있는 젊은이들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사명이기도 했다. 서산에서 자랐지만 이희호는 어려서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논매고 밭일하는 것이 서툴렀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일단 맡으면 피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성격대로 논두렁 밭두렁을 다니며 농촌 아낙들과 똑같이 일했다. 그런 스스럼없는 태도 때문에 그곳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다.
이희호의 눈에 비친 농촌 여성들의 현실은 가혹했다. 여성들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짓눌렸고, 집안일과 바깥일을 모두 함께 하느라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희호는 뒷날 미국 유학을 갈 때 ‘돌아와서 농촌여성교육기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다. 결국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그 꿈을 접었지만, 여성의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뒤로도 이희호의 관심사로 남았다.
1945년 8월15일 충남 예산 삽교공립보통학교에서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은 이희호는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쳐 함께 읍내 거리로 뛰쳐나가 해방의 감격을 나눴다. 바로 다음달 짐을 꾸려 삽교를 떠난 이희호는 증기기관차의 지붕에 올라타 그을음을 뒤집어쓰면서도 기쁨에 넘쳐 서울로 향했다. 사진은 그 시절 열차의 앞머리와 지붕에까지 빼곡히 승객을 태운 채 달리던 ‘해방자호’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45년 8월15일. 그날 이희호는 삽교의 학교에 있다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심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격정적으로 노래했던 바로 그 감격과 흥분이 이희호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희호는 가르치던 학생 10여명을 데리고 일본인 교장과 선생들이 있는 학교를 빠져나와 자취방으로 갔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학생들에게 나라가 해방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가르쳤다. 그 시절 애국가 가사는 지금과 같았지만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었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아직 없었다. 이희호는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목청껏 부르며 삽교 거리를 행진했다. 소방서에 들어가 확성기를 틀고 주민들을 향해 일본이 항복했다고, 나라가 해방됐다고 큰소리로 알렸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합창했다. 아직 일제의 공권력이 살아 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기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동진공화국’ 붓글씨 써 벽에 걸고
새 나라 부푼 꿈에 밤 꼬박 새운 뒤
다음날 기차 타고 서울로 출발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지른 감격적인 해방 행진이었다. 어쩌면 의식의 밑바닥에 오랫동안 그런 생각이 깃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이희호는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짐을 쌌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라는 말을 붓글씨로 써서, 벽에 걸어놓은 족자에 덧붙였다.
“왜 동진공화국이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도 민족 지도자들이 새로운 공화국 건설을 꿈꾸며 임시로 붙인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동진공화국이라는 글씨를 써놓고 그날 밤 잠이 안 와서 꼬박 새웠습니다.”
새 나라, 새 조국에 대한 꿈을 붓글씨로 써 족자에 담은 셈이었다. 이튿날 이희호는 기차 창문에 그 족자를 걸어놓은 채로 삽교를 떠났다. 1년 4개월 만이었다. 천안에서 서울행 기차로 바꿔 탈 때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열차 지붕 위로 올라가야 했다.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마다 그을음을 뒤집어썼지만, 해방의 기쁨에 들뜬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희호의 새카만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