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3회 결혼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YWCA 총무 이희호를 찾아갔다
정치 문제에서 둘은 의견이 같았다
처음엔 서로 동지의식이 강했지만
둘의 감정은 먹이 번지듯 번져갔다 마흔이 다 된 사람들의 만남이었으므로 둘 사이에 흐르는 것은 연애감정보다는 동지의식이었다. 더구나 이희호는 애교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상대를 떠보려고 밀고 당기기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격의 없이 말을 들어주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희호의 방식이었다. 김대중에게 이희호는 ‘은은한 매력의 소유자’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감정은 마른 장작의 불처럼 빠르게 타오른 것이 아니라 수묵화의 먹처럼 마음의 한지에 천천히 번졌다. 김대중이 기억하는 이희호는 이지적이지만 교만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남학생들이 누님이라고 부르며 찾던 이희호는 세월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았다. 생각이 좀더 깊어지고 넓어졌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얘기는 주로 정치였다. 쿠데타 직후였고 이 나라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때였다. ‘혁명 공약’대로 한다면 쿠데타 세력은 질서를 바로 세우고 정권을 민간에 넘겨준 뒤 본래의 임무로 되돌아가야 했다. 과연 그렇게 할 것인가. 당시 지식인들이 많이 보던 <사상계> 안에서도 쿠데타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는 쿠데타 주체세력의 ‘혁명 공약’과 강력한 지도력에 기대를 걸었다. 반대로 함석헌은 <사상계>에 쓴 글에서 “혁명은 민중만이 할 수 있다”며 쿠데타를 비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준하나 함석헌이나 모두 쿠데타 세력을 독하게 비판하는 자리에 서고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지만 그때는 아직 쿠데타 주역들의 정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민주당의 지리멸렬에 지친 국민 중 상당수는 군인들의 완력을 박력으로, 나라를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투지로 받아들였다. 그 완력에 정통으로 맞은 김대중은 당연히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구악보다 더한 신악’이라는 쿠데타 주역들의 본모습이 드러날 날이 오고 있었다. 김대중이 보기에 이희호는 시국을 보는 눈이 정확했다. 이희호와 김대중 사이에 의견일치를 이루는 지점이 많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지식인들의 정치토론에 가까웠다. 그러는 중에 서서히 교감이 커졌고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도 깊어졌다. 마주앉으면 맑은 물속처럼 상대의 심중이 들여다보였다. 함께 있는 것이 편했고, 편한 상태로 더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이 자랐다. 사랑의 감정이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감정은 그렇게 무르익었다. 이희호는 그해가 다 가기 전에 김대중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직 저쪽에서 청혼을 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지요.” 김대중은 “잘생긴 남자”였다
해박한 지식과 신념이 있었다
무일푼이지만 꿈이 큰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호가 김대중을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는 남자로서의 매력이었다. 이희호가 본 김대중은 한마디로 말해 멋있는 남자였다. 이희호는 훗날에도 지인들이 왜 김대중과 결혼했느냐는 질문에 지나가듯 “잘생겼잖아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런 외적 매력이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데우는 데 밑불 노릇을 한 것은 분명했다. 둘째는 인간 자체의 매력이었다. 이희호를 놀라게 한 것은 김대중의 해박한 지식이었다. 김대중은 시간을 아껴 가며 책을 읽고 공부했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소화해 현실에 적용했다. 그래서 김대중의 말은 공리공담에 흐르지 않았다. 또 김대중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그 신념을 일상에서도 적용했다. 김대중은 관용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자기를 핍박한 사람도 미워하지 않았다.
외삼촌 이원순(맨 왼쪽)은 미국 유학을 주선하고 결혼식장을 제공해주는 등 이희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일제 초기 하와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주미 대표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경제인으로도 기여해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의 부인 이매리(바로 뒤쪽)는 1967년 7대 국회의원으로 김대중과 함께 의정활동을 했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찾아왔다
“가진 건 없지만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머뭇거림 없이 청혼을 받아들였다 김대중은 살이 쭉 빠진 모습으로 나타나 그동안 많이 아팠다고, 그리고 몹시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희호의 눈가에 물기가 찼다. “저도 찾아가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람들 이목 때문에….” 이희호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여들었다. 그 순간 김대중은 이희호의 손을 잡았다. “사랑합니다.” 두 사람은 그날 찬 기운이 도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저녁 늦도록 이야기했다.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청산유수의 달변가도 이때만큼은 목소리가 떨리고 말을 더듬었다.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하겠다고 벌써 결심했기 때문에 그 청혼을 머뭇거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당사자는 마음을 굳혔는데 주위에서 ‘이 결혼 안 된다’며 자기 일인 양 막아섰다. 가족이 반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와이더블유시에이 선후배들도 말리고 나섰다. 객관적인 상황을 보면 결혼에 반대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김대중은 두 아이가 딸린 홀아비에 빈털터리였다. 전셋집에는 몸이 성치 않은 홀어머니가 있었고, 또 심장판막증으로 앓아누운 여동생이 있었다. 미국 유학까지 갔다 와 여성계 지도자로 뻗어나가고 있는 사람이 이런 궁색한 처지의 남자와 결혼한다니, 누구나 균형이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눈물을 흘려가며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화여전 스승이고 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갑순의 회고다. “그가 와이더블유시에이 총무로 있은 지 3년이 되던 1962년,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확실히 좋은 소식이어야 하는데, 와이더블유시에이 선배 격인 우리 몇 사람은 적극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방이 김대중씨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이희호)가 나오기 힘든 함정에 빠지는 것 같은 노파심의 작용 때문이었다고 할까? 좋은 일꾼 한 사람을 빼앗기는 것 같은 아쉬움이라고 할까? 여성 지도자로서 기대를 했기 때문이라고 할까? 어쨌든 우리 나이 먹은 사람들은 기회 닿는 대로 그 결혼이 깨지게 하는 공작을 했다.” 와이더블유시에이 선배들의 공작은 이희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김갑순의 이어지는 회고다. “그의 결심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특히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다’라는 말에 어느 누구도 그 결혼을 하지 말라고 반대할 수 없었다.” 이희호의 결심이 단단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희호 심중에 아무 두려움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김대중과의 결혼은 앞날이 어떻게 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모험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 생각해봐도 쉽지 않은 결심이었으니,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반대한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반대가 심한 중에 이희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에 있던 선배 조아라는 서울에 올라온 길에 이희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큰 인물이다. 결혼생활에 더러 어려움들이 따르겠지만, 사람 하나 보아라.”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 강원용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강원용은 “험난하고 시련 많은 가시밭길이겠지만 정치가의 내조자로서 사는 데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결혼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원용의 예견대로 이희호와 김대중의 삶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이희호가 처음부터 ‘정치가의 내조자’로서 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내내 이희호는 여성운동가의 길을 계속 걸었다. 이희호가 여성운동가로서 활동을 접은 것은 남편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외압 때문이었다. 남자에게 부담을 주기 않기 위해
결혼식은 외삼촌 집에서 했다
결혼반지도 이희호가 마련했다
둘은 온양온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이희호는 김대중을 아버지에게 데리고 갔다. 집안에서 이희호의 결혼을 아무 말 없이 받아준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잘 살아라.” 딸이 반대 많은 결혼을 감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 편치 않았겠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시집 못 간 노처녀를 치우게 됐다고 후련해하기도 했지요.” 이희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지만, 지나간 일이라 속 편하게 하는 말이다.
주위의 반대와 우려 속에 결혼식을 올린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시절 여느 신혼부부들처럼 충남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사진은 인근 아산의 현충사를 둘러보는 모습으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성역화 사업을 하기 이전이다. 맨 오른쪽은 안내원.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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