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1962년 12월17일 대통령 4년 중임제를 뼈대로 한 제3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이어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하는 문제가 정치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5·16 주체세력은 쿠데타 직후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권력을 민간에 넘겨줄 뜻이 없었다. 1963년 내내 박정희는 민정 이양을 놓고 끊임없이 의사를 번복하는 ‘번의 정치’를 계속하다가 8월30일 대장 계급장을 달고 예편했다. 전역식에서 박정희는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했다. 박정희는 전역한 그날 즉시 공화당에 입당하고 이튿날 공화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가 됐다.
박정희가 5대 대선에서 동원한 것은
정치자금과 권력기구만이 아니었다
지역감정이라는 전에 없던 수법을 썼다
남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비로소 이희호의 얼굴에도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쳐들었다
박정희도 국회와 연결한 인터폰으로
김대중의 일문일답식 추궁을 들었다
답변을 제대로 못한 장관들은
박정희에게 불려가 혼이 났다
앞서 군사정권은 1962년 3월16일 정치활동정화법을 발표해 4369명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윤보선의 신민당 동지들을 포함해 정치인 대다수의 발이 묶였다. 박정희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안 윤보선은 3월22일 대통령직을 내놓았다. 이듬해 1월을 기해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였던 정치인들의 족쇄가 풀렸다. “남편은 해금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얼마 뒤 중앙정보부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어요.” 중앙정보부 국장은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하라고 김대중을 회유했다. “우리 제안을 거절한다면 앞으로 8년 동안은 정치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협박도 했다. 김대중은 “민주당 대변인을 지낸 사람이 그 당을 쓰러뜨린 사람들이 제일이다 하고 다니면 변절자 소리만 들을 것 아니냐”며 제의를 거절했다. 국장은 돌아가는 김대중의 등에 대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중앙정보부의 회유공작에 많은 사람들이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공화당은 1963년 2월26일 창당했다. 김대중은 2차 해금 대상에서도 제외됐다가 2월27일에야 마지막으로 복권됐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려난 김대중은 옛 동지들과 함께 민주당을 재건하느라 바쁘게 뛰었다. 1963년 7월18일 창당대회를 열어 여성 정치인 박순천을 당수로 선출했다. 김대중은 다시 민주당 대변인이 됐다. 박순천은 김대중과 이희호가 결혼한 것을 뒤늦게 축하했다. “김대중 대변인이 이희호와 결혼하다니…, 이제 두 날개를 달았습니다.” 박순천과 이희호는 여성운동 선후배 사이였다. 이희호가 1952년 부산에서 여성문제연구원을 세울 때 박순천을 지도자로 모셨고,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때는 박순천의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다. 이희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박순천은 김대중이 이희호와 함께한다면 정치인으로 대성할 거라고 예견한 것이었다. “나는 박순천 선생을 여성 지도자로서 존경했고 인간 자체로도 좋아했어요. 어려울 때 친정어머니처럼 따뜻하게 위로해준 분이었지요.”
1963년 11월 총선에서 승리를 한 김대중은 6대 국회 개원 6개월 만에 13회나 본회의 발언을 하며 최다 발언 기록을 세운다. 민주당 대변인이자 사실상 초선 의원이었던 그는 국회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철저한 준비로 ‘대통령 박정희도 경청하는 송곳 질의’를 했다.
민주당이 재건되기에 앞서 옛 신민당도 자유당과 무소속 정치인들을 모아 민정당을 창당했다. 1963년 10월15일로 잡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정당은 윤보선을 야권 후보로 세웠다. 후보를 내지 않은 민주당은 윤보선을 지지했다. 윤보선의 지명도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민주공화당은 중앙정보부가 막후에서 만든 정당이었다. 쿠데타 직후 ‘혁명과업’을 완수한다는 명분 아래 박정희와 김종필이 창설한 중앙정보부는 수만명의 요원을 촉수처럼 거느리고 음지의 비밀정부로 군림했다. 중앙정보부는 1962년 1월부터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새 정당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당을 조직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 시기에 터진 ‘4대 의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정치자금을 마련하려고 꾸민 불법 작전의 꼬리가 잡힌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먼저 대규모로 주가를 조작해 수십억원의 부당이익을 챙겼다. 지금 시세로 치면 수천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이었다.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이 패가망신했고 자살자가 속출했다. 중앙정보부는 주한미군의 위락시설용으로 워커힐 호텔을 짓는 과정에 개입해 거액의 공사자금도 빼돌렸다. 또 자동차산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일본산 소형 자동차 2000여대를 수입해 ‘새나라’라는 이름을 붙여 시중 업자에게 팔아넘겼다. 이런 수법으로 수억원의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파친코(회전당구대) 사건도 군사정권이 아니면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도박기구 파친코 880대를 일본에서 들여와 영업 허가를 내주고 돈을 챙겼다. 이렇게 해서 모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공화당 창당에 들어갔다. 공화당은 부패 위에 세워진 당이었다.
4대 의혹 사건이 터지자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내놓고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났다. 4대 의혹 사건은 군사정권이 저지른 부정부패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군정 말기에는 ‘3분 폭리 사건’이 터졌다. 시멘트·밀가루·설탕 ‘세 가지 가루’(3분)를 독점한 기업들이 가격을 조작해 폭리를 취하는 것을 묵인해주고 그 대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사건이었다. 주눅 든 언론은 쿠데타 세력의 간 큰 도둑질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결 마당이었지만, 박정희와 김대중의 충돌이 시작된 선거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공화당에 입당한 직후 김대중은 박정희의 입당이 위헌임을 알아내 폭로했다. 대통령 권한대행과 최고회의 의장 직을 사퇴하지 않은 채 입당한 것은 대통령의 정당 가입을 금지한 헌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공화당은 헌법보다 우위에 있던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급히 개정하고 박정희의 입당 날짜를 9월4일로 바꿔 곤경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바로 이 일이 동기가 돼 박정희가 김대중을 미워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치자금과 권력기구를 총동원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가까스로 따돌렸다. 박정희가 동원한 것은 정치자금과 권력기구만이 아니었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 진영은 지역감정 자극이라는 전에 없던 수법을 썼다. 박정희 후보의 찬조연사 이효상은 대구에서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니 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의 임금님을 모시자”고 지역정서에 불을 질렀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총책이었으며 1948년 여순사건 뒤 붙잡혀 군대 안 남로당 조직망을 모두 넘겨주고 살아났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박정희는 윤보선의 폭로에 맞서 “선량한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치던 옛 한민당 수법을 되풀이하는 매카시즘”이라고 반격했다. 윤보선의 ‘색깔 공세’는 일부 지역에서 역효과를 냈다.
선거 결과는 15만6000여표 차이 박정희의 승리였다. 박정희는 서울을 비롯해 경기·충청·강원 지역에서 모두 패했으나 영남과 호남에서 이겼다. 호남은 윤보선보다 박정희에게 35만표를 더 주었다. 두 후보의 최종 표차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수치였다. 5대 대통령선거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선거였다. 이후 박정희의 핍박을 받게 되는 호남이 박정희를 더 지지했으며, 박정희가 틈만 나면 써먹게 될 매카시즘이 박정희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한 달 남짓 지난 11월26일 제6대 국회의원선거가 열렸다. 쿠데타 후 처음 치러지는 총선에서 김대중은 민주당 후보로 목포에서 출마했다.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을 도왔던 목포상고 후배 권노갑, ‘선거의 달인’ 엄창록이 이번에도 김대중의 참모로 뛰었다. 호흡이 잘 맞았다. 공화당 후보는 목포 거부의 아들 차문석이었다. 이희호는 그때 만삭의 임부여서 남편의 선거운동을 도울 수 없었다. 11월12일 이희호는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선거가 끝난 뒤에야 홍걸이 얼굴을 보았어요.” 이희호는 4년 뒤 제7대 총선 때부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과 함께 뛰며 선거를 자기 일처럼 치르게 된다.
선거운동이 막바지로 향하던 11월22일 미국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김대중은 케네디 암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인들 마음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40대 지도자 케네디는 젊은 김대중의 정치적 모델이자 모범이었다. 선거운동 내내 김대중은 케네디의 용기 있는 삶과 안타까운 죽음을 생각했다.
공화당은 이 선거에서도 전국의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관권의 영향은 목포에도 미쳤다. 그때 상황을 반전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목포경찰서 정보반장 나승원이 ‘국회의원 선거대책’이라는 부정선거 비밀 지령문을 폭로한 것이다. 야당이 들고일어나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박정희는 내무부 장관, 치안국장, 목포경찰서장 파면으로 꼬리를 잘랐다. 목포에서 공화당의 검은손이 묶이자 김대중은 비로소 대등하게 선거를 치렀고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이로써 김대중은 정치적 도약의 발판을 얻었다. 그러나 전국의 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공화당은 전체 175석 중 110석을 휩쓸었고, 야당인 민정당이 41석, 그리고 김대중이 속한 민주당이 13석을 얻는 데 그쳤다.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2년 뒤 민정이양 공약’을 수차례 번복한 끝에 군복을 벗고 1963년 10월15일 5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 사진은 1963년 8월30일 강원도 철원 7사단에서 열린 대장 전역식에서 박정희가 ‘다시는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퇴임사를 한 뒤 부인 육영수(오른쪽)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비로소 이희호의 얼굴에도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쳐들었다. “결혼하고 열흘 만에 남편이 반혁명 혐의로 잡혀 들어갔을 때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사람들이 ‘그것 봐라, 결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그랬거든요.” 이희호를 향하던 주위 사람들의 불안과 걱정의 눈길이 그제야 안심과 축하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국회에 들어간 김대중은 정치로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결심하고 10년 동안 준비한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희호는 6대 국회가 남편의 무대가 되어 가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김대중은 개원 후 6개월 동안에만 13번이나 본회의에서 발언하며 6대 국회 최다 발언 기록을 세웠다.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김대중의 최대 강점은 말이었다. 말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말에 담긴 내용이었다. 설득력은 구체적인 수치와 딱 떨어지는 사례와 빈틈없는 논리에서 나왔다. 김대중은 국회도서관에 살다시피 했다. 김대중을 만나려면 의원 사무실이 아니라 국회도서관으로 가라는 말이 돌았다. “국회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새벽에야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집에 있을 때도 항상 책상에서 읽고 쓰고 하였지요. 10분 질의할 일이 있으면 10시간 준비를 했어요.”
이희호는 이희호대로 남편의 의정활동을 도왔다. 이희호가 한 일은 신문을 샅샅이 읽고 정책 제안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이었다. 영자신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신문과 잡지에 나타난 국제정세도 두루 살폈다. “영자신문으로는 <코리아타임스>를 구독했고,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랑 미국 국제관계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도 받아 보았어요. 신문·잡지를 꼼꼼히 읽는 게 나에게도 공부였지요. 뒷날 남편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외국 신문·잡지를 읽고 세계정세를 보는 안목을 키운 것이 국제사회에 구명 요청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김대중의 의정활동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김대중의 첫 저서인 국회 발언집 <분노의 메아리>에 실린 박순천의 추천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한번 단상에 올라서서 현하의 웅변으로 조리정연하게 문제의 핵심을 하나하나 파헤쳐 가면, 만당이 숙연하게 그의 발언을 경청하는 것이 6대 국회의 한 모습이었다.”
김대중이 창안한 용어도 유행어가 됐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은 이후 김대중의 원칙과 실용의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어로 자리잡았다. ‘경제통’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재벌 중심 특권경제를 비판하고 대안으로 ‘대중경제’를 제시했다. 또 그때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일문일답을 국회 대정부 질문에 도입했다. 실력과 자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일문일답이었다. 장관들은 김대중과 하는 일문일답을 두려워했다. 대통령 박정희도 국회와 연결한 인터폰으로 김대중의 일문일답식 추궁을 유심히 들었다. 답변을 제대로 못한 장관들은 박정희에게 불려가 혼이 났다.
김대중이 6대 국회에서 활약하던 때 이희호가 겪은 일이 있다. 어느 날 민주당 국회의원 부인과 함께 종로5가의 한약방에 들렀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이희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한의사가 막 들어선 이희호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바깥양반이 사모님 덕으로 우두머리가 되겠습니다.” 한의사는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웠다. “그때는 그 말이 남편이 민주당 총재가 된다는 뜻인가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지요.” 이희호는 남편의 정치적 도약이 어디에까지 이를지 아직 다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