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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허화평 전화에 나갔더니 ‘각하 만나지 않겠냐’ 물었어요”

등록 2016-02-21 20:08수정 2017-01-09 10:47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10회 옥중서신 (상)

이희호 평전 이전 글 보기

1981년 5월1일부터 동교동 가택연금이 풀리면서 이희호는 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5월10일엔 특별사면으로 큰아들 김홍일과 시동생 김대현도 풀려났다. 그날 저녁 서울 수유리 한빛교회에서 열린 환영예배에서 석방자들은 고문과 허위자백으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조작된 과정을 생생히 증언했다. 앞줄 왼쪽부터 전대열·김홍일·박성철(김대중 경호실장)·오대영(김홍일 친구)과, 김대현(가운데 줄 안경 쓰지 않은 이) 등 대전교도소에서 함께 풀려난 관련자들.  사진 이종옥씨 제공
1981년 5월1일부터 동교동 가택연금이 풀리면서 이희호는 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5월10일엔 특별사면으로 큰아들 김홍일과 시동생 김대현도 풀려났다. 그날 저녁 서울 수유리 한빛교회에서 열린 환영예배에서 석방자들은 고문과 허위자백으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조작된 과정을 생생히 증언했다. 앞줄 왼쪽부터 전대열·김홍일·박성철(김대중 경호실장)·오대영(김홍일 친구)과, 김대현(가운데 줄 안경 쓰지 않은 이) 등 대전교도소에서 함께 풀려난 관련자들. 사진 이종옥씨 제공
1981년 4월30일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이 이희호를 찾아와 연금이 해제됐다고 알렸다. 그날로 동교동 집 대문을 지키던 경찰이 철수했다. 이희호는 5월1일부터 형사가 동승하지 않은 채 차를 탈 수 있게 됐다. 1년 만에 느끼는 자유의 공기였다. 이희호는 하루걸러 한 번씩 청주교도소와 대전교도소를 찾았다. 5월10일 전두환 정권은 김홍일·김대현·박성철을 대전교도소에서 출감시켰다. 특별사면이었다. 함께 수감된 김옥두·한화갑은 풀려나지 못했다. “홍일이가 출감한 날 저녁 한빛교회에서 환영예배가 열렸지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어요. ‘내란음모’ 관련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다 출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모두들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남편에게서 돈을 받아 학생 데모에 사용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려고 그렇게 괴롭혔다고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액수까지 불러주며 적으라 하고, 거부하면 적어낼 때까지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를 다들 울면서 들었지요.”

왼쪽부터 문재린(문익환 목사 부친) 목사·이희호·이종옥(뒷줄·이해동 목사 부인)·이 목사 등이 환영예배에 앞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이종옥씨 제공
왼쪽부터 문재린(문익환 목사 부친) 목사·이희호·이종옥(뒷줄·이해동 목사 부인)·이 목사 등이 환영예배에 앞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이종옥씨 제공
5월12일 이희호는 큰아들 홍일, 시동생 김대현과 함께 청주교도소로 내려가 김대중을 면회했다. “남편은 홍일이와 시동생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데도 자식과 동생 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하고, 말도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다시 헤어져야 했어요.” 이희호와 김대중이 감옥 안팎에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1981년 10월부터는 한 달에 두 번 면회를 할 수 있게 됐다. 면회 시간도 20분으로 늘었다. 면회실에 있던 인터폰도 사라졌다. 그 대신에 유리창에 구멍을 뚫어 말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게 했다. 이희호는 그해 내내 청주교도소와 대전교도소를 113차례나 오갔다. 면회는 할 수 없었지만 남편을 가까이에서 응원하려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쉬지 않았다.

81년 5월1일부터 동교동 연금해제
열흘뒤 김홍일 김대현 등 사면
한빛교회 석방 환영예배 열려
“고문 이야기 들으며 다들 울었죠”

완전히 홀로 격리 수감된 김대중
“왜 하느님이 날 살리셨나…원망도”
이희호는 날마다 편지로 ‘위로 격려’
김대중은 월 1회 봉함엽서만 ‘허용’
깨알 글씨로 원고지 100장 분량 적어
신앙고백 문명비판 역사탐구 ‘가치’

82년 2월초 정무수석 뜻밖 제안
며칠뒤 공중전화 “오늘이 그날입니다”
청와대 빙빙 돌다 근처 안가로 안내
조금 기다리자 방에 들어온 ‘전두환’

청주교도소의 김대중은 다른 재소자들과 만날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었다. 완전한 격리 수감이었다. 운동시간에도 혼자였다. “한번은 남편이 운동시간 중에 뜰에 나갔다가 교도소 위층에서 ‘김대중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요. 올려다보니 학생처럼 생긴 젊은이였는데 곧바로 교도관에게 끌려갔대요.” 격리 생활은 정신의 위기를 불러왔다. 1981년 2월21일에 쓴 편지에서 김대중은 그런 사정을 밝혔다. “여기 온 지 불과 20일이고 가족 면회 한 지 10일인데 이 모든 것이 반년이나 된 것 같습니다. 그토록 세월이 지루하고 고독이 무섭다는 것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체험으로 느끼게 됩니다.”

1981년 11월 가족 면회 중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이제 비로소 하는 얘기지만 그동안 발광 직전까지 가는 고통이 있었다. 내 평생 이렇게 치욕스럽고 괴로워해본 적이 없었다. ‘왜 하느님이 날 살리셨나’ 원망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잠을 자다가도 숨이 턱 막히면 발광할 지경이 되어서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극복했다. 이제 그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비로소 말한다.” 김대중은 면회, 편지, 독서, 화단 가꾸기를 낙으로 삼아 힘든 수감 생활을 견뎠다. 가족 면회가 유일한 대화 시간이었다. 면회가 끝나자마자 다음 면회 날짜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꼽아보았다.

1981년 2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청주교도소 독방 수감 시절 김대중과 이희호는 편지를 통해 일상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상의 교감을 나눴다. 이희호는 날마다 일기 쓰듯 모두 649통의 편지를 보냈고, 김대중은 봉함엽서 29통으로 화답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1년 2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청주교도소 독방 수감 시절 김대중과 이희호는 편지를 통해 일상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상의 교감을 나눴다. 이희호는 날마다 일기 쓰듯 모두 649통의 편지를 보냈고, 김대중은 봉함엽서 29통으로 화답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한 달에 한두 번 허락된 면회는 그리움의 갈증을 푸는 데 턱없이 모자랐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편지로 대화를 대신했다. 1981년 2월9일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 날이랍니다. 그의 작품처럼 그의 생애는 고난과 고통에 싸여 있었다고 해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돼 저 시베리아로 유형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김대중이 2월21일 편지에서 “면회 때 당신의 눈물을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릅니다”라고 쓰자 이희호는 2월26일의 답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눈물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나는 너무 눈물이 많은 사람이랍니다. 나는 남 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서 눈물을 삼켜버리고 보이지를 않습니다. (…) 나는 요즘 교회에 나가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나와 견딜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1981년 8월9일은 이희호가 육군교도소의 남편을 처음 면회하고 1년이 된 날이었다. 이희호는 편지에서 한 해 전의 그 상황을 떠올렸다. “당신의 생사도 행방도 모르고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악몽에 시달리다가 군교도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조인 마음을 달래고 만난 당신의 모습은 꼭 반 조각으로 졸아들어 보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할 말도 다 잊어버렸고 돌아오는 마음은 더 아팠습니다. 운명이 기구하다는 말을 가져다 붙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진은 한달 한번만 허용된 까닭에 앞뒤에 빼곡히 원고지 100장 분량을 채워 쓴 봉함엽서.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사진은 한달 한번만 허용된 까닭에 앞뒤에 빼곡히 원고지 100장 분량을 채워 쓴 봉함엽서.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김대중이 청주교도소로 옮긴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듯 편지를 보냈다.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할 때까지 2년 동안 보낸 편지가 649통에 이르렀다. 편지는 철저하게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정치나 시국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쓰지 못했다. 이희호는 동교동 식구들 소식을 전하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적어 보냈다. 동교동 집 뜰에 핀 라일락꽃을 꺾어 편지에 붙여 보내기도 했다. 김대중에게는 한 달에 단 한 번 봉함엽서 한 장이 허용됐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횡포였다. 할 말이 태산처럼 많았던 김대중은 이 부당한 제약에 글씨를 깨알처럼 줄이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적응했다.

종교와 신앙은 두 사람 편지의 주요 주제였다. 이희호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에 기대어 남편에게 용기를 주고 성서의 내용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넌지시 전했다. 김대중도 믿음과 구원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자주 밝혔다. 기독교의 역사와 성서의 가르침을 끌어와 정치적 견해를 에둘러 내보이기도 했다.

1981년 10월28일 편지에서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두 가지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사도들의 전교 이래 전자에 치중해온 감이 크며 이 경향은 지금도 많은 교회 사이에 그대로 성행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이 편지에서 “어떤 저명한 역사학자”(아널드 토인비)의 견해를 빌려 인류가 문명시대에 들어와 전쟁·노예화·착취·인종차별이라는 네 가지 죄를 지었으나, 그 가운데 전쟁을 제외하고는 소멸해 가고 있다고 전하고,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큰 수치와 고통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즉 ‘이러한 개선은 근대 인도주의적 정치사회운동의 산물인데 그 도덕적 근원은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를 주로 추진한 세력은 그리스도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 교회의 현실에 실망한 계몽적 지식인과 그 지지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지적에 대해 이희호는 11월3일 편지에서 이렇게 응답했다. “오늘의 교회나 교역자, 교인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자리에서 행함이 없는 죽은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이 크리스천의 사명인 줄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한쪽에) 치중하는 경향이 날로 더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희호는 “반드시 개인과 사회가 같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썼다.

김대중은 1981년 11월27일 편지에서는 한국 역사 속의 선각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서 보냈다.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 중에서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전봉준 장군 세 분을 특별히 존경해왔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경이입니다. 일개 시골 서당 훈장이 순식간에 그와 같은 거대한 수십만 민중을 조직하고 궐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요구하고 실천한 정책이 당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역사적 진로와 일치한 반봉건·반외세 그리고 민중을 위한 정부였다는 사실은 그의 천재적인 지도자적 자질을 입증합니다.” 김대중은 이 편지에서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에 대한 생각도 적었다. “최수운의 탄생은 참으로 이 땅의 정신사의 이적이며 한국인의 사상적 창조성의 한 표본이기도 할 것입니다. 최수운은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서 생활의 궁핍을 못 이겨 포목 행상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가운데 민중의 곤고를 직접 체험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어선, 민중이 낳은 신앙가요 철인이요 실천가였습니다. 최수운의 동학은 눌린 자의 종교였으며 반체제적이고 민족적이고 주체적이고 저항적인 종교였습니다. 그는 포교 3년 만에 갔지만 그의 정신과 업적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12월2일 이희호는 이렇게 답장했다. “오늘 기다리던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정신력에 건강에 대한 걱정이 덜어집니다. 한결같이 꾸준한 그 정신력에 누구든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번 면회 때 당신이 편지를 쓰기 위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시간을 들이는지 또 몸의 불편, 환경의 부자유함을 모두 극복하는 것까지 더욱더 자세히 알 수 있었으므로, 당신의 편지를 나와 아이들에게 귀한 선물로 간직하고자 합니다.” 김대중의 편지는 편지 형식을 빌린 신앙고백이자 문명비판이고 역사탐구였다. 김대중은 봉함엽서 한 장을 쓰는 데 열두 시간을 넘게 들였다. 200자 원고지로 셈해서 100장을 넘어가는 분량이었다. 이희호의 편지는 옥중의 남편에게 주는 위로이자 격려이고 기도였다.

겨울이 되자 이희호는 추위를 못 견디는 남편을 생각하며 털장갑·털양말·털모자를 직접 짜 감옥에 넣었다. “털장갑은 오른쪽 검지 끝 부분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어요. 남편이 책을 읽을 때 검지손가락을 살짝 빼내 넘길 수 있도록 해주었지요. 추운 날씨에 책 읽기 좋다며 남편이 아주 고마워했어요.” 1982년 1월6일 김대중의 생일을 맞아 아들들이 아버지를 면회하는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김대중은 그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보고 감방으로 돌아와 <옥중단시>라는 제목의 시조를 지었다. “면회실 마루 위에 세 자식이 큰절하며/ 새해와 생일 하례 보는 이 애 끓는다/ 아내여 서러워 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 (…)”

새해 막내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 옥중의 김대중에게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이희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홍걸이가 고려대 불문학과에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합격을 했어요. 막내는 아버지 때문에 어려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초등학생 때는 도쿄납치사건을 겪었고 중학교 때는 3·1사건으로 아버지가 진주교도소에 갇혀 있었고요. 또 고등학교 2학년 때 신군부에 잡혀가 사형선고를 받았잖아요. 그래서 말도 없고 외톨이로만 살았는데 바르게 커서 대학에 들어가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지요.” 정보기관은 홍걸의 대학 입학 과정에도 개입해 훼방을 놓았다. “홍걸이의 합격을 취소하라는 압력이 있었다고 해요. 안기부에서 그런 압력을 가했는데, 김상협 고려대 총장이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대중은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홍걸이 입학 건이 잘 해결되니까 지금은 홍업이 일이 걱정이 됩니다. (…) 사실 두 자식이 대학 나온 지 10여년이 되도록 사회활동을 못하고 거기다 하나는 결혼도 아직 못한 채 30을 넘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젯밤에는 홀로 두 자식 일을 생각하다 ‘누가 이런 판에 내 자식들에게 직장을 줄 것이며 누가 자기의 소중한 딸을 우리 집에 시집보내려 하겠는가’ 생각하니 자식들에 대한 나의 죄가 너무도 크고 무거운 것이라는 생각에 비통한 심정을 억제치 못했습니다. 자식들뿐 아니라 나로 인한 형제들, 친척들, 벗들에게 끼친 누를 생각하면 죄스럽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1982년 3월25일 편지)

1982년 2월 초 이희호는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실세 중의 한 사람이라 깜짝 놀랐어요. 이틀 뒤에 프라자호텔 21층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만나보니 체구가 자그마한 사람인데 웃음기가 전혀 없었어요.” 허화평은 이희호에게 대뜸 물었다. “왜 해외에서 구명운동을 하십니까?” 이희호가 대답했다. “그분들이 스스로 돕는 것이지요.” 허화평은 이희호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각하를 만나지 않겠습니까?” “만나주신다면 뵙지요.” “그럼 나중에 날짜와 시간을 알려드리지요.” 허화평은 전화번호를 적어서 이희호에게 주었다. “나는 주위의 의논할 만한 분들과 그 문제를 놓고 이야기했지요. 다들 만나라고 했어요.” 얼마 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전화의 목소리는 이희호에게 공중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공중전화를 쓰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들도 도청당하는 건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전화의 목소리는 “6시에 박물관 서쪽 문으로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다.

이희호는 6시 정각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검은 승용차가 다가오더니 이희호를 태웠다. 차는 빙빙 돌아서 청와대로 들어갔다가 다시 문을 통과했다. “거기서 내려 작은 다리를 건너니 자그마한 단독 건물이 나왔어요. 청와대 근처 안가인 것 같았어요.” 방으로 안내된 이희호는 “반지를 빼라”는 말을 들었다. “반지를 빼라니 무척 의아했어요. 경호 원칙상 모든 금속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묵주를 끼고 있었어요. 언젠가 명동성당 상점에서 산 것이었는데, 하트 모양에 십자가가 새겨진 것이었어요. 그 일이 있기 전에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는데, 추기경님한테도 반지를 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대통령이 악수할 때 아프다고요.” 조금 기다리자 사람이 들어왔다. 전두환이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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