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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나이트라인’ 방송 마지막 순간 남편이 외쳤어요…웨이트!”

등록 2016-03-20 20:03수정 2017-01-09 10:49

1983년 ‘5·18 광주민중항쟁’ 3주기를 계기로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자, 김대중은 미국에서 비상대책위를 꾸려 전폭적인 ‘한·미 민주세력’ 연대 투쟁에 나섰다. 80년 5·17 쿠데타 이래 상도동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영삼이 단식 8일째인 83년 5월25일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자 김덕룡 등 측근들이 병실에서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3년 ‘5·18 광주민중항쟁’ 3주기를 계기로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자, 김대중은 미국에서 비상대책위를 꾸려 전폭적인 ‘한·미 민주세력’ 연대 투쟁에 나섰다. 80년 5·17 쿠데타 이래 상도동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영삼이 단식 8일째인 83년 5월25일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자 김덕룡 등 측근들이 병실에서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14회 망명활동

이희호 평전 이전 글 보기
김대중과 이희호가 미국 전역을 돌며 민주화 투쟁을 하고 있을 때 1983년 5·18 광주항쟁 3돌을 맞아 서울에서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김영삼은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채 가택연금에 처해져 있었다. 김영삼은 단식투쟁 시작과 함께 성명을 내 ‘구속된 학생·종교인·지식인·근로자를 모두 석방할 것, 정치활동규제법에 묶인 정치인과 민주시민의 정치활동을 보장할 것, 쫓겨난 교수·근로자·학생을 복직·복학시킬 것, 언론통폐합 조처를 철회하고 해직 언론인을 복직시킬 것, 반민주 악법을 폐지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시킬 것’을 요구했다.

김영삼은 단식 8일째인 5월25일 강제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래 국내 야당 정치인의 첫 저항 행동이었다. 미국의 김대중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이 민주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김영삼 총재 단식투쟁 전미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워싱턴의 문동환, 뉴욕의 임정규, 로스앤젤레스의 김상돈, 샌프란시스코의 김재준이 지역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서울에서는 5월31일 함석헌·홍남순·이문영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기독교회관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갔고, 6월1일에는 전직 국회의원 33명을 포함해 60명이 모여 범국민연합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동교동계 인사들도 동참했다.

 83년 6월4일 김대중(오른쪽)과 이희호는 미국 워싱턴디시의 듀폰 서클에서 열린 ‘김영삼 단식 지지’ 시위에 참가했다.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 회복’ 팻말을 목에 걸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동환 목사(왼쪽)를 비롯한 재미동포 70여명과 주미한국대사관과 백악관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83년 6월4일 김대중(오른쪽)과 이희호는 미국 워싱턴디시의 듀폰 서클에서 열린 ‘김영삼 단식 지지’ 시위에 참가했다.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 회복’ 팻말을 목에 걸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동환 목사(왼쪽)를 비롯한 재미동포 70여명과 주미한국대사관과 백악관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지원하는 글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다. 하버드대학 교수 제롬 코언이 김대중의 글을 받아 손질했다. 김대중의 기고문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6월9일치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 “미국인들 중에는 한국의 독재정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국가 안보와 사회 안정을 위해 묵인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의견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없으면 지속적인 안정도 기대할 수 없다. (…) 민주정부와 민주제도를 회복하지 않으면 한국은 안정될 수 없다. 김영삼씨의 단식은 미국 정부가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심각한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과 재미한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미국의 여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6월4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김영삼 단식투쟁을 지지하는 거리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70여명의 교포들과 함께 워싱턴의 듀폰 서클에서 ‘김영삼을 구출하라’라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행진을 했어요. 남편도 ‘한국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쓴 팻말을 목에 걸고 지팡이를 짚고 걸었지요.” 김영삼은 6월9일 23일 만에 단식투쟁을 끝냈다.

1983년 8월21일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동지’였던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전 상원의원이 귀국길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당한 사건은 김대중·이희호에게 큰 충격을 줬다. 두 부부는 귀국 전 워싱턴의 아키노 자택에서 마지막 조찬을 함께 했다. 왼쪽부터 김대중, 코라손 아키노, 이희호, 베니그노 아키노.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3년 8월21일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동지’였던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전 상원의원이 귀국길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당한 사건은 김대중·이희호에게 큰 충격을 줬다. 두 부부는 귀국 전 워싱턴의 아키노 자택에서 마지막 조찬을 함께 했다. 왼쪽부터 김대중, 코라손 아키노, 이희호, 베니그노 아키노.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주화라는 과제를 놓고 긴밀하게 협의했다. 그해 광복절에 워싱턴과 서울에서 두 사람은 공동명의로 ‘민주화 투쟁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했다. “온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은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하나가 되어 손잡고 우리 민족사의 지상과제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려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 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공동투쟁이 본격화하자 1983년 9월 서울에서 김근태를 비롯한 학생운동 출신 청년 운동가들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다. 민청련은 창립선언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오늘의 이 모임은 지난 20년간에 걸쳐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통해 성장·발전해온 운동 역량의 값진 결실이며, 특히 저 80년 5월 피맺힌 민중의 항쟁에서 솟아오르는 운동 역량의 결단이다.”

그해 8월21일 미국 망명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간 필리핀 전 상원의원 베니그노 아키노가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키노 상원의원은 우리가 미국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성일 박사 소개로 만났어요.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키노 상원의원이 살던 집에서 아침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지요. 아키노 의원은 호방하고 낙천적이어서 남편과 대화가 잘 통했어요. 반면에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나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지요. 그렇게 말이 없던 사람이 후에 대통령이 됐을 때 무척 놀랐어요. 우리는 고국을 떠나 민주화 운동을 하는 처지라 동병상련을 느꼈고 서로를 민주화 동지로 여겼지요.”

김대중은 아키노 암살 소식을 듣고 즉시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주의 동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필리핀 정부를 규탄했다. 또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한 결과로 이런 사건이 났으므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필리핀 방문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코라손 아키노는 남편의 유업을 이어받아 1986년 2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20년 독재를 무너뜨리고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 “아키노 상원의원이 필리핀으로 돌아갈 때 자기가 쓰던 아주 낡은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우리에게 주었어요. 그게 우리에게 가슴 아픈 기념품이 됐지요.”

1983년 10월 <에이비시방송>의 시사토론 프로그램 ‘나이트라인’에 출연한 김대중은 국회 외무위원장 봉두완과 맞서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 상황을 증언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70년대 후반 <동양방송>(TBC) 앵커였던 봉두완(왼쪽)과 인터뷰 중인 이희호(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1983년 10월 <에이비시방송>의 시사토론 프로그램 ‘나이트라인’에 출연한 김대중은 국회 외무위원장 봉두완과 맞서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 상황을 증언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70년대 후반 <동양방송>(TBC) 앵커였던 봉두완(왼쪽)과 인터뷰 중인 이희호(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1983년 9월부터 김대중은 하버드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보스턴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남편은 1973년에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학 교수의 초청장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계속 출국금지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하는 바람에 갈 수가 없었는데, 이때 공부할 기회가 생긴 거예요.” 국제문제연구소는 닉슨·포드 행정부 시절 대통령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가 하버드대학 교수 시절에 세운 연구소였다. 키신저는 김대중과 여러 방면에서 말이 통하는 대화 상대였다. 두 사람은 만나면 국제문제, 특히 중국과 아시아의 미래를 화제로 삼았다.

김대중은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가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 강연하러 왔을 때 함께 점심을 먹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팔메가 구명운동을 해준 데 대해 뒤늦게 감사를 표했다. “하버드에서 공부하는 1년 동안 남편은 무척 바쁘게 지냈어요. 일주일에 2~3일은 보스턴에서 지내고 다른 날은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강연활동을 했지요.”

김대중은 하버드대학 연구원 생활을 마친 뒤인 이듬해 6월 한국 경제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밝히는 논문을 제출했다. <대중참여경제론>(mass-participatory economy)이었다. “남편은 초빙연구원이라 논문을 제출할 의무는 없었는데, 1년 동안 공부한 것을 글로 남기고 싶어 했어요.” <대중참여경제론>은 1950년대부터 구상하고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제시한 ‘대중경제론’을 좀더 포괄적이고 정교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당시 뉴저지 주지사 수석경제자문관으로 있던 럿거스대학 교수 유종근이 논문을 영어로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대중은 이 논문에서 자유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삼되 정부의 적절한 개입으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지역간·부문간·도농간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저소득층에게 불리한 간접세를 직접세로 바꾸고 누진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대중이 구상한 경제체제는 요약하자면 “전통적 자본주의 경제, 사회주의 경제, 그리고 서구 사회민주주의 경제의 경험을 총괄적으로 비판·수용해서 풍요와 정의를 아울러 실현할 수 있는 자유경제체제”였다.

“하버드대학 교수 세 사람이 남편의 논문을 심사했는데, 그중 두 사람이 한국 경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분들이 남편의 논문을 우수 논문으로 뽑았어요. 국제문제연구소는 남편의 논문을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뜻도 밝혔지요.” <대중참여경제론>은 이듬해 하버드대학에서 출간됐고 하버드대학 부교재로 채택됐다. 1986년에는 한국어로 번역돼 <대중경제론>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대중경제론>은 금서로 묶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었어요. 미국의 대다수 대학 도서관에도 비치됐고 한국 경제에 관한 수업 교재로 사용됐다는 말을 들었어요.”

1983년 가을 레이건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미국 안에서 레이건의 방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 인권을 탄압하는 전두환 독재정권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백악관에 방한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우리도 백악관 앞에서 레이건 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를 벌였어요.”

레이건의 방한 문제가 정치 이슈로 떠오르자 10월에 <에이비시(ABC) 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인 테드 카플의 <나이트라인>에서 한국 인권 상황을 주제로 한 토론을 마련했다. <나이트라인>은 미국인 수천만명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에이비시 방송>은 김대중에게 토론 출연을 요청했다. “출연 제의를 받고 처음에 남편은 망설였어요. 영어 발음과 듣기에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 의논했는데,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보다는 말하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나가라고 권했어요. 남편은 결국 토론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했지요.”

토론자는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쪽과 민주화 세력을 지지하는 쪽으로 똑같이 나뉘어 미국인 2명, 한국인 2명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방송을 앞두고 우리 쪽 미국인이 갑자기 나올 수 없다고 통보를 했어요. 그러니 남편 혼자서 두 사람과 토론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지요.” 김대중의 상대로 나온 사람은 당시 국회 외무위원장을 맡고 있던 봉두완이었다. “봉두완 의원은 영어에 능통한 분이었어요. 남편은 패리스 하비 목사의 도움을 받아 토론을 준비하고 함께 <에이비시>의 워싱턴 방송국으로 갔지요.” 진행자 카플이 김대중의 영어 실력이 걱정이 됐는지 방송 전에 만나자고 했다. 카플은 김대중과 이야기를 해본 뒤 “그 정도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안심시켰다. “외국인이 꼭 영어를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편하게 하십시오.”

카플은 김대중의 민주화 투쟁 경력을 잘 알고 있었다. 1981년 성탄절에는 프로그램을 마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는 우리들의 영웅이 있습니다. 그들은 옥중에서, 혹은 감시 속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소련의 사하로프, 폴란드의 바웬사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고통 속에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들의 영웅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토론회가 열린 그날도 카플은 김대중에게 “당신이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며 싸우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김대중은 한국의 인권유린 실태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진행자는 상대편 쪽에 김대중의 지적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상대방은 직답을 피하고 남북의 대치 상황, 안보 위기 상황을 열거했다. 한국에서 안보 문제가 심각한 정치적 이슈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해 9월1일 미국에서 오던 대한항공기가 소련 영내를 침범했다가 격추돼 승객과 승무원 267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0월9일에는 전두환이 버마(미얀마)를 방문하던 중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사건이 일어나 부총리 서석준을 포함해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상대편이 안보 상황만 이야기하고 인권 문제를 회피하자 카플은 김대중에게 다시 발언권을 넘겼다. 김대중은 인권 문제와 레이건 방한을 연결했다. “이렇듯 취약한 인권상황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독재정권을 격려해주고 인권 탄압을 용인하는 것이 됩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은 대다수 한국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그건 한국에도 미국에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을 신중히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1983년 5·18 3주기 김영삼 ‘단식’ 돌입
김대중 ‘뉴욕타임스’에 투쟁지원 기고
6월4일 이희호도 함께 워싱턴 시위

‘23일 단식’ 계기 ‘양김’ 민주화 공조
‘8·15’ 기념 서울-워싱턴 공동성명도
여세몰아 9월 김근태 등 민청련 결성

8월21일 아키노 마닐라공항서 피살
‘동병상련 동지’ 암살에 충격속 ‘애도’
“타이프라이터도 선물주고 갔는데…”

9월부터 하버드대 연구원 된 김대중
이듬해 6월 ‘한국경제 분석’ 논문도
‘대중참여경제론’ 하버드대 등 교재로

10월 레이건 대통령 방한 반대 나서
‘에이비시방송’ 테드 카플 프로 출연
앵커 출신 민정당 봉두완과 토론
“인권유린은 박정희정권때” 강변에
“82년도 국제사면위 보고서에 있다”
김대중 막판 ‘반격’ 발언으로 큰 반향

토론이 끝나갈 무렵 상대편에서 한국 인권 상황과 관련해 허위사실을 진실인 양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김대중씨가 말한 인권유린은 박정희 정권 때의 일입니다. 지금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인권유린도 없습니다.” 그 말이 토론회 전체의 분위기를 뒤바꾸는 효과를 냈다. 진행자는 그대로 토론을 마치려 했다. 그 순간 김대중이 외쳤다. “미스터 카플! 웨이트! 웨이트!” 진행자는 짧게 하라며 마지막 발언 기회를 주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한 내 발언은 나 개인의 주장이 아닙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1982년도 보고서에 있는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국무부의 1982년도 <인권보고서>에도 그대로 적힌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네 정부가 보증한 것입니다.” 그 말로 토론이 끝났다.

“남편의 마지막 말이 상대편을 제압했어요. 방송이 끝난 뒤 미국 전역에서 격려 전화가 걸려왔지요. 우리 교포들이 많이 본 건 미국 곳곳에 있는 한국 영사관들이 교민들에게 <나이트라인>을 보라고 독려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남편이 영어를 못해 쩔쩔맬 줄로 알고 자신있게 보라고 했던 건데, 결과는 정반대였어요. 남편은 감옥에 있을 때 영어 문법책을 여러 권 반복해서 읽었어요. 그래서 발음은 좋지 않아도 문장이 정확했어요. 유창하지 않아도 진실을 담은 말이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거지요.” 김대중은 텔레비전 토론에서 승리했지만, 레이건의 방한을 막지는 못했다. 레이건은 1983년 11월12일 한국을 방문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레이건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직접 휴전선을 시찰하기도 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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