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이희호는 1985년 2월8일 전두환 정권의 ‘구속’ 협박에도 불구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한인 동포사회를 비롯해 미국내 지지자들의 ‘신변안전’ 우려 속에 부부는 송별 모임을 통해 귀국의 의지를 밝혔다. 사진은 85년 2월초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귀국 강연회 때로 아키노 상원의원의 동생을 비롯해 수천명이 모였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와 김대중이 미국 망명 생활을 하던 중에 둘째아들 홍업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신부는 한국의 캐나다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대학 후배 신선련이었다. 두 사람은 1980년 2월 홍업의 친구 신혼 집들이에서 서로 인사했다. 호감을 느끼던 두 사람을 묶어준 것은 공교롭게도 5·17 쿠데타였다. 수배를 받아 도망 다니던 홍업이 캐나다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신선련에게 도움을 청했다. 신선련은 캐나다대사관의 상무관 집을 은신처로 마련해 주었다. 상무관 집은 안전했지만 발각될 경우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홍업은 집을 나와 다른 도피처를 찾았다.
뒤에 홍업이 붙잡혔다가 두 달 만에 집에 돌아와 이희호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고백했다. “대구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네 형수도 부산 사람 아니냐?” “아버지가 청와대 사정비서관이래요.” 남편을 죽이려 하는 정권에 복무하는 사람이라니 이희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홍업이는 집에 온 뒤 바로 연금을 당해서 밖에 나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면회하러 갈 때 공중전화로 연락했대요.” 두 사람은 연금이 해제된 뒤 다시 만났다가 1982년 12월 홍업이 아버지 망명길에 동행하는 바람에 다시 헤어졌다. “미국에서 보니 자주 전화도 하고 한국에서 편지도 오더라고요.”
1984년 3월 둘째 홍업 미국서 결혼
대구·군출신·사정비서관의 딸 ‘공수’
전두환 ‘특사’로 미국 건너온 바깥사돈
“김대중 귀국 만류 임무로 왔다”에 난감 84년 5월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 출범
김영삼 제의로 상도동·동교동계 연합
김대중 고문에 김상현 공동의장 대행 84년 9월초 김대중 고심끝 ‘귀국 통보’
안기부 간부 찾아와 “신변보장 못한다”
미국무부 차관보 등도 “귀국 미뤄달라”
김대중 “그래도 간다” 보도에 큰 반향
“제2 아키노 안된다” 안전보장 여론 85년 2월8일 총선 나흘전 귀국 ‘확정’
LA 고별강연에 교민 등 5천여명 운집
뉴욕 환송연설회에도 수천명 몰려
이희호 “고난받는 사람 기억해달라”
이희호와 식구들은 비밀작전을 펴듯 신부 될 사람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작업을 했다. 주위의 도움을 받아 ‘호바트 앤드 윌리엄 스미스 대학’ 입학 허가를 얻고 비자와 여권도 받았다. 1983년 12월 예비신부가 미국으로 왔다. 두 사람은 이듬해 3월 메릴랜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쪽은 하객도 없고 부모님도 참석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문동환 박사가 신부 아버지를 대신했지요.” 홍업의 나이 만 34살이었다. “그 뒤 일주일쯤 지났을까. 사돈 내외가 미국으로 오셨어요. 바깥사돈은 그 무렵에 청와대에서 감사원으로 돌아가 감사위원을 하고 계셨어요. 홍업이 결혼 소식이 알려지자 후임 사정비서관이 사표를 내라고 했대요. 각오하던 일이라 사표를 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연유를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사실대로 알렸더니 ‘자식 일은 마음대로 안 된다’며 사표를 반려하고, 늦었지만 가서 축하해주라고 휴가를 주었다고 해요.”
이희호는 얼마 뒤 다시 미국으로 찾아온 바깥사돈을 만났다. “남편의 귀국을 만류하라는 임무를 받고 왔대요. 바깥사돈이나 우리나 참 난감한 일이었지요.” 이희호와 김대중이 귀국한 뒤 홍업 부부는 캘리포니아로 옮겼다. “홍업이는 아버지가 만든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서 일하고 며느리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불문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1988년에 귀국했지요.”
1984년 새해 초에 미국 국무부가 <인권보고서>를 발표했다. 각국 인권 상황을 알리는 연례 보고서였다. 1984년의 <인권보고서>는 한국 군사정부의 인권유린 실태는 빼놓고 1983년 한 해 동안 개선된 사실만 나열했다. 김대중은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2월13일 인권 담당 차관보 엘리엇 에이브럼스가 국무부 사무실에서 김대중을 만났다. 김대중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크게 바꿔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날의 심경을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건너편 방이 바로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실이었다. 그곳은 한국의 정부를 지지하고 한국과 정책협력을 도모하는 곳이었다. 한 공간 안에 이토록 상반된 업무를 하는 곳이 공존했다. 미국의 이상과 현실이 마주보고 있었다. 미국의 두 얼굴은 나를 상념에 잠기게 했다.”
김대중은 미국 정치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의 독재 실상을 알렸다. 아무리 보수주의자라고 해도 독재만큼은 대놓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미국 국민은 모두 민주주의 신봉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한국에서 적을 만드는 일입니다.” 김대중의 주장에 공화당 의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미국 망명 2년째인 1984년 5월 서울에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출범했다. 앞서 1983년 가을부터 김영삼은 동교동계 인사들을 만나 민주화운동 연합전선을 펼 것을 제의했다. 동교동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연합전선에 함께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김영삼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연합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서울의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연합전선에 참여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민추협은 광주항쟁 4돌이 되는 1984년 5월18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발기인 모임을 열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날 민추협은 민주화투쟁선언문도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은 소수의 부패한 특권층만을 위해 절대다수 국민들을 핍박하고 수탈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군부독재를 청산해서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민추협을 발족한다.”
민추협은 상도동계의 김영삼·김동영·최형우·김명윤과 동교동계의 김상현·김녹영·조연하·예춘호로 8인위원회를 구성했다. 또 망명중인 김대중을 고문으로, 김영삼을 공동의장으로 하고, 김대중이 귀국할 때까지 김상현이 공동의장 대행을 맡기로 했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체제였다. 민추협은 민주화 세력의 새로운 구심이 됐다.
1984년 내내 김대중은 귀국 문제로 고심했다. “연초부터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두고 문동환 목사를 비롯해 주위의 여러 분들하고 상의했어요.” 김대중은 미국 각계 인사 278명에게 귀국 관련 질의서를 보냈다. 대다수가 ‘미리 시기를 정하지 말고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라’는 답을 보내왔다. “남편은 그해 가을에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한국에 돌아가서 싸우겠다고요.” 김대중은 9월 초에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에게 편지를 써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며칠 뒤에는 대통령 전두환에게도 등기우편을 보내 귀국하겠다고 통보했다.
김대중은 성명을 발표해 귀국 이유도 밝혔다. ‘미국 체류의 목적인 신병 치료를 충분히 했고,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 고생하는 인사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을 느꼈으며, 한국의 정치상황이 매우 심각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조국에서 할 일들이 있다.’ 김대중은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에도 귀국하겠다는 뜻을 알렸다.
그 무렵 이희호의 몸이 다시 무너져 내렸다. “미국에 와서도 쉴 틈이 없었어요. 몸이 불편한 중에도 집에 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하루에 커피를 100잔도 더 탔지요. 가을쯤에 탈진이 돼 주저앉았어요. 입안에 침이 마르고 혀가 갈라져 먹지를 못했어요. 관절염이 재발해 발목·손목·무릎이 몹시 아팠지요.”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조금 더 있다 귀국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편은 벌써 일정이 다 짜여서 더 미룰 상황이 아니었어요. 나는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날이 많았고, 귀국할 때 짐을 싸는 것조차 하지 못했어요. 손목에 힘을 줄 수가 없었지요.”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귀국을 막으려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안기부 간부가 미국으로 김대중을 찾아와 “귀국을 강행하면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김대중은 안기부 간부의 협박을 무시했다. 안기부 간부가 돌아간 뒤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와 인권 담당 차관보가 김대중을 만나자고 했다. “미국 정부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귀국을 미루면 좋겠습니다.” 김대중은 다시 주위 사람들과 상의한 뒤,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편지로 써 국무부에 전달했다.
얼마 뒤 <뉴욕 타임스>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김대중에게 물었다. “오늘 한국에서 청와대 정무담당 비서관이 당신이 귀국하면 투옥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그래도 귀국하겠습니까?” 김대중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귀국하겠다는 것이 자신의 확고한 뜻이라고 다시 밝혔다. 김대중의 말이 신문에 보도되자 미국 전역에서 큰 반향이 일었다. 방송과 신문의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다. “김대중을 제2의 아키노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삽시간에 일었다. 미국 국무부도 태도를 바꾸어 한국 정부에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청와대 정무담당 비서관의 말은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미국 국무부는 김대중에게 국무부 청사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김대중은 국무부 직원 200여명을 앞에 두고 ‘미국과 제3세계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제3세계의 우익 독재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데, 미국은 반공만 앞세워 이런 현실을 외면한다고 지적했다. 김대중은 또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로 반미운동이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가 직시하고 대외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의 연설이 끝나자 국무부 직원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미국 국무부가 김대중의 강연을 마련한 것은 전두환 정권을 향해 김대중의 안전 귀국을 보장하라고 촉구하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서울에서는 이듬해 2월12일로 잡힌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11월14일 대학생 264명이 종로구 안국동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왜 우리는 민정당사를 찾아왔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고 건물 9층에 올라가 철제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농성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민정당 해체를 주장하고 노동악법 철폐, 전면 해금 실시, 집시법·언론기본법 폐지를 요구했다. 다음날 새벽 중무장한 경찰 수백명이 벽을 부수고 최루탄을 난사하며 당사에 진입해 농성하던 학생들을 모두 연행했다.
11월30일 전두환 정권은 3차 해금 조처를 단행했다. 신군부는 정권을 탈취한 뒤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567명의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나, 두 차례에 걸쳐 대다수를 풀어주고 99명을 금지 대상으로 묶어놓고 있었다. 3차 해금으로 이철승·신도환·김재광·정해영·이민우·이기택·김녹영·김동영을 비롯해 84명이 정치활동 금지 족쇄에서 풀려났다. 김대중·김영삼·김상현을 포함한 15명은 여전히 금지 대상에 묶여 있었다. 3차 해금 이후 민추협 주요 간부들과 민추협에 들어가지 않은 해금 인사들 사이에 신당 창당을 모색하는 만남이 빈번해졌다. 김영삼은 12월8일 민추협 외부를 대표하는 이철승과 만나 “국민이 원하는 참신한 야당을 창당해 민주거점의 구축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는 공동발표문을 냈다.
12월11일 민추협은 고문 김대중, 공동의장 김영삼, 공동의장대행 김상현의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선거투쟁’을 선언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기구로서 민추협의 조직을 계속 유지·확대·강화하면서 범국민적 민주화 추진의 일환으로 선거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우리의 선거투쟁은 민정당에 대한 반대투쟁을 그 핵심으로 한다. 민추협은 민주화 추진을 위하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민주적인 자생정당이 창당된다면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다.”
새 야당 창당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관제야당 민한당의 전·현직 의원들이 무더기로 탈당했다. 새 당의 이름은 신한민주당(신민당)으로 정해졌다. 신민당은 12월20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이어 2·12 총선을 20여일 앞두고 1985년 1월18일 서울 앰배서더호텔에서 대의원 532명이 참석해 창당대회를 열고 이민우를 총재로, 김녹영·조연하·이기택·김수한·노승환을 부총재로 선출했다. 총재 이민우는 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대리하는 관리자였다. 언론에서는 신민당이 총선에서 잘해야 20석 미만을 얻는 데 그칠 것으로 예측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급조한 당이 잘될 리 없다는 판단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일반 유권자의 투표 기권을 유도하려고 선거일을 일부러 혹한기로 당겼다.
김대중은 귀국 날짜를 2월8일로 잡았다. 총선을 나흘 앞둔 날이었다. 귀국 준비를 하는 중에 김대중과 이희호는 교민들과 함께 송별 모임을 여러 차례 열었다. 1월19일 밤 로스앤젤레스의 그랜드 올림픽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김대중의 고별강연에는 청중 5000여명이 참석했다. 미국의 <에이비시> <엔비시> <시비에스>를 비롯해 방송과 신문 기자 80여명이 김대중의 강연을 취재하러 왔다. 지미 카터와 미국·일본·유럽 정계 지도자들이 귀국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청중의 함성 속에서 김대중은 태평양 건너 고국을 향해 소리치듯 열정을 다해 연설했다. “한국 정부가 나를 다시 투옥한다면 전세계 여론과 인류의 양심, 그리고 우리 국민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제2의 아키노로 만든다면 그들도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희호도 이날 남편과 함께 청중 앞에 서서 고별인사를 했다. “우리처럼 고난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주십시오.”
2월3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환송연설회에도 수천명의 청중이 모였다. “그날 아키노 상원의원 동생도 우리를 환송하는 자리에 왔어요. ‘우리 형은 암살당했지만 김대중씨는 꼭 살아서 귀국해야 한다’고 외쳤지요.” 김대중은 다시 교민들에게 말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4·19 혁명과 광주항쟁을 일으킨 이 민족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성원을 그대로 조국에 가지고 가서 그 힘으로, 그 용기로 싸울 것입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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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고별강연에 교민 등 5천여명 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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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고난받는 사람 기억해달라”
이날 이희호는 고별인사에 나서 “우리처럼 고난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영삼의 단식 투쟁’을 계기로 ‘연합전선’을 맺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1984년 5월18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발기인 모임을 열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출범시켰다. 84년 7월1일 김영삼(오른쪽 둘째) 공동의장 등이 민추협 현판을 내걸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5년 1월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왼쪽)은 대통령 전두환에게 등기우편을 보낸 데 이어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유병현 대사에게 귀국 의사를 밝혔다. 정동채(가운데) 비서실장 등이 수행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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